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Dec 06. 2017

일 대 백 - 태도에 관하여

타인의 생각을 바라보는 시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만든 어느 수업에서 접한, 뇌리에 지금껏 남아 있는 말이 하나 있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나 오늘날의 많은 일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얘기다. 그 말 앞뒤의 정확하고 구체화된 맥락이 생각나지 않아 기회가 된다면 그 수업을 다시 듣고 싶을 정도다. 요는 "'온라인'은 '여론'이 되지 못한다"라는 것이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온라인상의 '반응'으로 보이는 것들은 대체로 자극적인 것들이 부각되거나 일부의 것이 마치 전체인 것처럼 과장되어 있기 쉽고 결코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애호박' 이야기로 시작된, 배우 유아인에 대한 이야기는 그 진짜 발단은 이제 온데 간데없고 오로지 비난과 혐오만이 남아 있다. 그는 "애호박 드립에 애호박 드립으로 성별 모를 영어 아이디 님께 농담 한 마디 건넸다가 마이너리티 리포터에게 걸려 여혐한남-잠재적 범죄자가 되었다"라고 적었다. 이보다 이 사단(이라고 굳이 불러야 할 만한 사안이라고 생각지는 않으나, 어쨌든 커다란 화두를 제공했다는 점에서.)의 시작을 잘, 그리고 정확하게 요약하는 바가 또 있을까. 

 

유아인의 생각이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비난(상당수는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비난'이라고 적어야 정확하다.)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 틀렸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에 명확한 정답을 가름하는 것보다 더 오답인 것이 또 있을까. 문제는 태도다. 유독 연예인이 자기 목소리 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이상하고 기이할 정도로 어려운 이 사회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한 그의 적극적인 발언은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더없이 자극적일 수 있다. 또한 '나대는 것', '자의식', '허세' 같은 말로 치부되기 딱 좋다. 문제는 '그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고 폭력적인 것이며 그를 옹호하는 것 역시 위험하거나 폭력적이다'라고 결론짓는 태도다.  

 

일부 평론가나 필진들이 그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글을 썼다. 나는 그런 글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침 최근에 조 라이트 감독의 <어톤먼트>(Atonement, 2007)와 그것의 원작인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읽었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누군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그것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앞서 '글을 못 쓴다', '생각이 설익고 뒤죽박죽이다'라는 식의 서술은 추하다. 글을 짓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조롱과 비하를 한다는 건 그만큼 그의 글재주가 비루하다는 것이다.


몇 달 전 개봉했던 어떤 외화의 번역을 두고 어느 트위터리안이 특정 단어의 번역을 두고 번역가를 겨냥한 욕설을 퍼부었다가 그 번역가가 해당 단어를 쓰게 된 상세한 배경과 그 단어의 어원과 의미를 설명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웃긴 일이다. 본인의 생각과 가치관이 그렇게나 소중하면, 타인의 것에 대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존중을 베풀어야 마땅하다. 적어도 생각의 범위도 140자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트위터가, 그런 생산적이고 안온한 '토론' 혹은 '토의'의 장이 될 가능성은 이미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리돌림'과 '사이버 불링' 외에 지금의 트위터에서 가능한 건 '지금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는 선택적 정보로서의 기능뿐인 것 같다.


나는 이 사태를 며칠간 관망하면서 단순히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연예인'을 소비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이전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화두는 아니다. "모든 것이 강제로 공개된 그들과 달리(한국의 연예인은 '공인'이라는 잘못된 별칭 - 단어의 쓰임이 곧 그 단어의 실체와 같은 것은 아니다. - 하에 사생활이 없다.) 대중은 '대중'이라는 무책임한 방패 하에 그들을 소비한다. 이런 건 '알 권리'가 아니다.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도 적은 바 있다. 수천, 수만의 익명은 노출된 한 명의 개인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한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유명한 사람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조심스러운 사회다. 선택적으로 최대한 자극적인 꼭지를 뽑아 선정적으로 전시하는 일부 언론의 태도와, 타인을 쉽게 평가하고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일부 '네티즌'의 태도가 불행을 부른다.


대면 상담한 적도 없는 타인의 소셜미디어에서의 일부 글만을 보고 '급성 경조증'이라 칭한 신들린 정신과 의사(정신과협회는 그가 기본적인 윤리를 저버렸다고 규탄했다.)를 비롯해 이 이슈에 시의적으로 편승하는 이들까지 가세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한국 사회의 연예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 사회는 개방적이지 않고, 관용적이지 못하며, 배려하지 않는 사회다. 게다가 학습하지 않는다. 채선당, 240번 버스, 현대카드, ... 몇 해에 걸쳐 수많은 사건들이 정확한 사실 관계 확인 없이 무비판적이고 무차별적으로 감정적인 확산만을 거듭한 끝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상기에 적은 이야기들과 동일한 맥락은 아니나 나는 그만큼 자연스럽게 '대중'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 '네티즌' 같은 단어들에 회의적이다. 그들은 이 느슨하고 소비적인 공간에서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


요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와 [멀고도 가까운]을 다시 조금씩 꺼내 읽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못한 책들이 많은데, 때가 되면 문득 꺼내보게 된다. 이 땅에서 남자로 태어나 자라고 살아온 나 역시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에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누려온 것들이 많을 것이다. 명백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소식들이나 데이트 폭력 이야기를 접할 때면 이 사회에서 내가 '남자'라는 것이 다행이기는커녕 미안해질 정도일 때도 있다. 누가 맞다, 누가 틀리다. 이 세상에 누가 그걸 정답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건 어떤 영화를 보고 "그건 10점짜리 영화여야 한다"라고 단정하는 것과 같고 그 영화에 대해 혹평한 사람에게 "영화 볼 줄 모른다"라며 비아냥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나는 여전히, 섣불리 판단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애초 따질 수 없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내가 더 중요하고 어쩌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태도이다. 타인의 말과 글에 대해 쉽게 '허세', '오글거림', '자의식 과잉' 따위를 운운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자신을 겨냥하지도 않은) 누군가의 말과 글에 '상처'를 받았다고 할 때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신 공격과 인권 운동을 과연 동일시 할 수 있을까.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귀국 전날, 뉴욕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