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2017), 그레타 거윅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의 모습을 보면서 몇 해 전 나의 대학교 졸업식 날을 떠올렸다. 졸업식은 나의 날이라기보다 '아들 학교 한 번 구경해보고 싶다'고 하셨던 부모님의 날에 가까웠다. 아들의 학위복과 학사모를 입고 쓰고 사진을 찍는 아빠의 모습. 모처럼 서울에 온 부모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쓰셨다. 편하게 가자며 집에서 학교까지 (지하철로 50분 걸리는 거리를) 콜택시를 탔고, 학교 앞에서 몇 만 원을 선뜻 꺼내며 꽃다발을 사고 사진사를 구했음은 물론이고, 자판기 커피 대신 열다섯 배는 더 비싼 커피전문점 커피를 마셨으며, 한식 뷔페에서 비싸고 배부른 점심을 먹었다.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를 싫어했다(싫어한다고 스스로 여겼다). 뉴욕 같은 곳의 예술 학교를 동경하며 지금 사는 동네를 친구에게 '철길 너머 구린 곳' 정도로 소개하기도 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오고 싶었던 건 좋은 학교여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독립적인 삶을 누리고 싶어서였다. 결과적으로는, 적어도 몇 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 등을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동시에 잠에서 깨서 씻고 학교를 다녀오고 밥을 먹는 일련의 일상을 나 혼자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틴'은 방 침대를 정리하고 옷을 개어놓는 것까지 (노크를 안 하는) 엄마의 영향 아래에 놓이는 것을 싫어하며, 엄마 몰래 뉴욕의 대학교에 지원서를 쓴다. 집을 곧 '벗어나고 싶은 곳'으로 여기며 친구에게도 동네의 비싼 남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 소개하기도 한다. 비록 <레이디 버드>(2017)의 첫 장면부터 그녀는 엄마와 불협화음을 빚어왔지만, '크리스틴'이 단지 엄마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관객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충분히 자라서 어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점점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숙고하고 책임져야만 하는 게 늘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대학에 간다고 해서 성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거나 경험한 관객이라면. 그리고 학업을 위해 어린 시절을 자라온 곳을 떠나는 일을 겪은 관객이라면. '크리스틴'의 열일곱부터 열여덟까지를 따라가는 <레이디 버드>가 멀고 먼 미국 소녀의 이야기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이름은 '크리스틴 맥퍼슨'이지만 엔딩크레딧에 오르는 그녀의 이름은 '레이디 버드 맥퍼슨'이다. 크레딧에 기재된 배우의 배역명은 영화가, 곧 감독이자 작가인 그레타 거윅이 '붙여준' 것이겠지만 이는 한편으로 '크리스틴'이 부모로부터 받은 가족의 성을 지키면서도 그녀가 '자신에게 스스로 붙여준 이름'인 '레이디 버드'가 포함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어딘가에서 그녀는 분명 "레이디 버드 맥퍼슨이에요"라며 자신을 소개할 것이다.
다시 내 졸업식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면, 그날도 나는 부모님의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다른 때보다 밥을 편히 팍팍 넘기지 못했던 나는 (다시 댁으로 돌아갈) 기차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며 얼른 가서 할 일 하라시는 엄마의 말을 못 이기는 척 수긍했다. 사실 그날 나는 부모님이 기차를 타러 승차 플랫폼으로 향하시는 두 뒷모습을 본 게 아니라, 지하철을 타러 지상 청량리역을 빠져나가는 내 뒷모습을 두 분께 보였다. 내가 중간에 뒤돌아보자 두 분은 직전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얼른 가라며) 손짓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나는, 멀어져 가는 나를 바라보는 두 분의 뒷모습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식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음을 아는 그 쓸쓸한 세월의 흔적을.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나는 각기 다른 대학교에서 두 번의 논술 시험을 봤다. 서울로 오는 두 번의 여정 중 처음 한 번은 엄마와 함께였고 다음 한 번은 혼자였다. "저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어요"라며 한사코 고집을 부려서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도 엄마와 함께 왔어도 좋았을 것 같다. 첫 번째 논술시험을 마치고 고사장 건물을 나서니 엄마는 좀 전(이라기엔 1시간 30분 전이지만)에 앉아계셨던 거기 그대로, 내가 나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서도 나는 시험을 보러 걸음을 재촉하는 내 뒷모습을 분명 보였겠지. 그리고 엄마는 시야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같은 곳에 시선을 떼지 않았겠지.
뭐든 자신의, 자식의 뜻대로만 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으시는 부모의 마음을 간섭, 참견 같은 단어로 잘못된 포장지를 씌워 외면하던 시기가 '크리스틴'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엄마의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듣게 된 순간, 아빠가 몇 년 동안 어떤 일을 겪고 있었는지 알게 된 순간, 엄마에게 첫 번째 섹스는 보통 언제쯤 하냐고 묻는 식의 작은 변화를 보인다. 이는 사랑의 흔적으로 읽힌다. 부모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는 순간. <레이디 버드>가 담은 소녀의 일 년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담고 있다. 실제 새크라멘토에서 자라 가톨릭 학교를 다녔던 배우 그레타 거윅이 처음 만든 각본과 연출로, 이미 <브루클린>(2015)에서 고향을 떠나 타지에 정착하게 된 이민자를 연기한 적 있는 시얼샤 로넌의 얼굴로.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이 자신을 배웅하는 부모나 가족을 가만히 바라보는 쇼트를 넣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신 살던 집에서 새로운 집으로, 혹은 공항에서 집으로, 어딘가에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크리스틴'과 엄마 '마리온'(로리 멧칼프)의 각자의 옆모습을 포갠다. 그러나 나는 내 경험을 떠올리면서 영화가 보여주진 않았지만 스크린 너머 그들의 일상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있었거나 꼭 있게 될, 그 뒷모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화의 느린 엔딩크레딧에 가장 처음 이름을 올리는 '레이디 버드 맥퍼슨'을 보면서. 처음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운전을 하고, 대학을 가고, 연기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이 세상의 모든 시작들을 응원하면서. (★ 9/10점.)
<레이디 버드>(Lady Bird, 2017), 그레타 거윅
2018년 4월 4일 (국내) 개봉, 94분, 15세 관람가.
출연: 시얼샤 로넌, 로리 멧칼프, 트레이시 레츠, 루카스 헤지스, 티모시 샬라메, 비니 펠드스타인, 스티브 헨더슨, 로이스 스미스, 오데야 러쉬 등.
수입/배급: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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