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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24. 2019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소통과 교감의 영화

영화 <증인>(2018)

억울하게 살인죄를 뒤집어쓴 사람의 무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결정적이고도 유일한 증언이 '지우'(김향기)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 설계한 것처럼 피고가 유죄라 말하지만 모두가 간과한 자폐 소녀 '지우'의 말이 사건의 열쇠를 쥐게 되고, 통쾌하고도 뭉클한 승리의 법정 드라마가 될 것이라고. 영화 <증인>(2018)을 보기 전에 예고편 등의 정보를 통해 어렴풋이 예상한 골자였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직접 꺼내 열어봐야 그 진짜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증인> 역시 짐작과는 조금 다른 영화였다. 좋은 쪽에서와 아쉬운 쪽에서 모두.


영화 <증인> 스틸컷

먼저 <증인>은 '법정 드라마'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원고와 피고의 치열한 공방과 대립, 결과를 쉽게 예단할 수 없는 판결의 과정이 중심을 이루는 영화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비교적 최근의 한국 영화 중에서는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가 법정 안에서 벌어지는 증언과 변론의 과정을 (관부재판이 장기화되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충실히 담아내었던 것을 떠올리면 <증인>은 법정 안에서의 이야기보다는 바깥, '지우'와 변호사 '순호'(정우성) 두 사람이 서로에게 스미는 과정의 영화다. 작 중 대사를 빌어 '지우'의 세계에 '순호'가 들어서는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밀도 있고 치밀하게 다뤄지는 재판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증인>은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한다. 또한 '지우'의 증언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지우'가 사건을 목격하는 장면이 영화 초반에 이미 제시되고, '지우'가 목격한 것이 어떤 장면이었느냐보다는 증인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중학생이라는 점으로 인해 내용이 증거로서 신뢰성이 있는지 여부가 근본적인 열쇠가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공판과 선고 자체보다 영화 <증인>이 주목하는 건 피고의 변호를 맡은 '순호'의 집과 직장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 특히 그가 '민변' 출신으로 현재 대형 로펌에 몸 담고 있는 데에서 오는 상황들이다. 여기서 '순호'가 소속된 로펌 대표(정원중), 그리고 '순호'의 오랜 친구이자 현재 '민변'에서 활동하는 '수인'(송윤아)이 주변 인물로 영화의 또 다른 가지가 된다. 원고 측의 검사 '희중'(이규형) 역시 '순호'와 직접적인 대립 관계에 놓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순호'가 자폐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이해를 하도록 돕는 역할도 겸한다.


영화 <증인> 스틸컷

문제는 '지우'가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일이 영화의 절정이 아니라 비교적 중반에 이미 등장하고 그 자체가 전개의 핵심이라기보다 '순호'와 '지우'의 관계에 있어 하나의 과정처럼 여겨지는 데 반해 '순호'의 주변 인물들은 다소 피상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특별출연에 해당하는 '수인'은 '순호'의 민변 옛 동료로 그가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서의 진정한 소명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순호'의 로펌 대표는 '순호'에게 "성공하려면 적당히 때가 좀 묻어야 한다"라며 새로운 직책을 제안한다.


영화 초반 '순호'가 변호를 맡은 것으로 보이는 한 수감자는 변호사의 벌이가 어떤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순호'에게) 변호를 안 맡았으면 원래 형량이 어떻게 되냐고 묻는 등 속물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그리고 로펌이 담당한 한 생리대 브랜드와 피해 소비자들 간 공방에서도 (로펌 내 모의법정 장면) '순호'는 회사가 피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승소할 수 있는 방법을 '민변' 활동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서'순호'는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로펌 일에 적응해가고는 있지만 영화가 그의 출근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 등에 있어 그가 일종의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앞서 언급한 '수인'과 로펌 대표의 캐릭터는 각각 '순호'에게 참된 변호사로서의 신념과 현실적인 이익 추구라는 대립항으로서 존재한다. 그 필요는 납득할 수 있으나, 로펌 대표와 생리대 브랜드 대표의 룸살롱 접대에 초대되는 '순호'의 모습이나, ('수인'으로부터 보내지는) 과거 민변 활동 시절의 '순호'의 사진, '수인'과 '순호'의 술자리에서의 대화 등 영화가 이들을 활용하는 방식은 그동안 많은 영화들에서 흔하게 목격되었던 요소들을 그대로 답습한다.


영화 <증인> 스틸컷


다행스럽게도 <증인>은 '순호'가 '지우'에게 다가가는 과정들을 꽤 단계적으로 착실하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이런 아이가 어떻게 증언을 하나'라고 생각하던 '순호'가, 자폐를 겪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의 소통이 요구된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 낯선 아저씨의 접근을 경계하던 '지우'가 퍼즐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매개로 '순호'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과정. 여기서 영화는 '지우'를 단지 법정에서의 결정적인 증언을 하게 되는 증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영화 속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에게까지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로 도약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지우'의 물음은 '순호'에게로만 향하지 않는다. 앞서 적은 일기에서 '이 질문은 스스로는 대답할 수 없다'라고 쓴 건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는 자평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평가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데, '지우'의 저 질문을 받은 '순호'는 동요하는 듯 보이며 그저 '지우'를 쳐다볼 뿐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순호'가 아니라 질문을 한 '지우' 자신으로부터 대답된다. 상기에 소개한 '순호'의 직업적 갈등과 고뇌로 출발해 <증인>은 '지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순호'의 내적 성장과 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세계의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에서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며,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지우'가 자폐아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증언은 신빙성을 의심받는다. 그러나 '지우'가 '순호'의 넥타이의 물방울무늬의 개수를 단번에 정확히 맞히는 것이나 수십 미터 떨어진 벽시계의 초침 소리도 들을 만큼 예민한 청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 특정한 분야에 있어 비범한 인지 및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는 것과 별개로 영화는 섣부른 판단이나 편견을 깨부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진정으로 마음을 여는 것. 스스로의 생각이나 주관을 과신하지 않는 것.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계속하는 것. 영화 <증인>은 거짓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또 행하는 일에 대해, 사람을 장애와 같은 겉보기로만 판단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극적인 전개를 앞세우기보다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소통과 교감에 대한 따뜻한 화법으로 그려내며 뭉클한 울림을 준다. 다소 삐걱거릴지라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영화다.





영화 <증인> 메인 포스터

<증인>(2018), 이한 감독

2019년 2월 13일 개봉, 129분, 12세 관람가.


출연: 정우성, 김향기, 이규형, 염혜란, 장영남, 박근형, 송윤아, 정원중, 김종수 등.


제작: (주)무비락, (주)도서관옆스튜디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증인> 스틸컷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 (2019년 1월 22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증인> 메인 예고편: (링크)



영화 <증인> 스틸컷

(★ 6/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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