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선 배우의 소식을 듣고
'(오늘은) 영화만 봐야지'라든가 '책만 읽어야지', '글만 써야지' 종류의 다짐은 항상 실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늘도 그래서 아무런 다짐이나 계획을 하지 않기로 하며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로 해장을 하고 집 청소를 했다. 문득 내 지난 행사 때 사진을 보면서 이 사람은 왜 마이크를 입이 아니라 코에다 대고 있나 생각하며 실실 웃고 있던 중이었는데 좋아하는 배우의 비보를 갑자기 들었다. '인생 뭘까...' 하게 되는 순간이란 내게는 이런 것들이다. 타국에 사는 시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는 일과 얼마 후 그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 한 번도 만나 뵌 적 없는 문학평론가의 글을 좋아하며 그를 마음속으로 늘 '선생님'이라 칭하곤 했는데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또 한 번 아득해지는 것. 좋아하는 기자의 반려견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게 되는 것. 그러다 '나만 슬퍼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되면 그것 나름대로의 소중한 위안이 있지만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슬픈 일들이 계속된다.
며칠 전 좋아하는 시인의 강연에서도 비슷한 화두로 이어질 수 있는 이야길 들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타인의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에 더 깊이 반응한다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일의 가장 중요한 쓸모는 바로 타인의 이야기를 해당 매개체를 통해 접하는 것인데,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슬프거나 혹은 슬픔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비극적일 수 있는 상황들을 내포한다. 가령 코미디조차 관객이나 시청자는 웃지만 등장인물이 무엇인가를 해내지 못하거나 좌절하게 되는 상황의 연속일 때가 많다. 예컨대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 세상 모든 것에 슬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는 가볍게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좋아하는 배우라고 했지만 그의 출연작을 많이 본 것도 아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조연이나 단역이었을지라도 그 작품에서 본 캐릭터 너머의 배우의 모습을 좋게 기억해왔다는 의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비보에 반드시 그와 친밀하거나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만이 슬퍼할 일은 아닐 것이다.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청소를 (일단은) 마무리해둔 채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사진첩을 살피는 동시에 내 할 일들의 목록을 헤아리던 중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중에도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 끊임없이 누군가 태어나도 또 누군가 죽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과 한 사람의 일이 작은 것에서부터 조금 더 큰 것으로 모이다 보면 그건 아무렇지 않은 것만은 아니게 된다.
곧 출간 예정인 니시카와 미와의 책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마음산책, 2019)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포기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어디까지든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 실린 편집자의 말처럼,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건 '만남을 귀히 여기고 이별을 가슴 아파 하는' 것일 텐데,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연민을 갖거나 희로애락에 공감하는 일도, 관계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에서 비롯할 것이다. 즐겨 구독하는 한 필자의 페이지에는 '불행에 지지 않기'라는 말이 적혀 있다. 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긴다는 게 아니라 삶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는 뜻이다. 오늘은 그래서 새삼스럽게도 다짐이란 걸 하나 해보기로 했다. 타인과 세상의 슬픈 일에 쉽게 무뎌지지 않기. 그러다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걸 떠올렸다. 누군가의 삶을 오래 기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