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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7. 2019

자기 생각이라고 그게 다 표현의 자유가 되진 않아요.

비판과, 비판이 아닌 것들

(3일 전에 쓴 일기의 연장이기도 하다.) 몇 년은 지나 정확한 문맥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나 아마 왓챠에서 모 평론가의 한줄평에 이어진 코멘트에서였던 것 같다. 내가 제대로 된 비판을 하고 싶으면 자기 취향과 다르다고 실망이라느니 신뢰할 수 없다느니 하는 이야길 하기 전에 자기 생각이 그와 어떻게 다른 지부터 이야기하는 게 마땅한 순서라고 이야기했더니, 정작 그의 답은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것이었다. 이제는 더 언급하기도 지치지만, 과연 상술한 이야기가,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것 자체를 구실 삼는 말이 비판이라고 할 수 있나. 어떤 필자의 견해가 본인 생각과 다르면 그 필자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인가?



씨네 21 김혜리 기자는 "20자 평과 별점은 영화 기자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붙이는 추신에 불과하니 영화 저널리즘을 그것과 동일시하지 말아 주세요. 본인의 마음에 든 영화를 비판한 평에 필자를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다는 대신, 나는 그 영화를 왜 좋아하는지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그 편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영화 안에서 서로를 널리 이롭게 하도록 해주세요."라고 쓴 적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수록된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라는 글을 통해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을 강조했고,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쓴 김영민 교수 역시 비판에는 건설적 제언과 대안 제시가 따라야만 한다고 썼다. 하나 더. 『마케터의 일』의 저자 장인성은 "'싫은 것'과 '이해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는 좋아하는 것만 이해하는 사람이 됩니다."라고 썼다.


장인성의 말을 여기에 붙이자면, 다른 의견에 개방적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동조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겠다. 무턱대로 '실망이다'라고 하는 건, '내가 신뢰할 수 있으려면 당신은 대체로 내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 감상평을 써야 한다'라고 전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게 꼭 비난이나 조롱의 단계에 이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겠다. 자신의 생각에 누군가 동조해주기를 원할 수는 있으므로, 순전히 본인이 기대했던 감상평과 달라서 문자 그대로 실망에 상응하는 어떤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 그런데 그걸 생각에 그치지 않고 직접 말이나 글로 꺼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아니, 어쩌면 한낱 소셜미디어에서 건설적인 대화와 토론의 장이 형성되기를 기대한 것 자체가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게다가 문화와 예술에 대해 논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자의식 때문에 리뷰와 비평에 대한 저 반응들에 더 민감하게 구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앞뒤 맥락도 충분한 설명도 없이 그냥 본인 감정만 일단 '표출'하는 게 우선인 사람은 대체로 타인에 대한 이해 내지는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뭐든 간편하고 즉각적인 것은 탈이 나기 마련이다. 요즘 소위 '인류애'를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 워낙 빈번하다 보니 나는 저 비뚤어진 덧글 문화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진다.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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