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바깥에서 펼쳐지는 영화들
<본 글은 광진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나루 42> 9호에 '극장 바깥에서 펼쳐지는 영화들 - 당신도 영화모임에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최근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우리집>을 관람했다. 영화에는 감독의 전작 <우리들>에 등장했던 육교와 분식집 등의 장소가 같은 로케이션으로 활용되어 그대로 등장하는데, 서로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지 않은 별개의 영화임에도 마치 3년 전 개봉한 그 영화를 여전히 이어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 공간이 주는 역할이란 사소해 보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나섰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만큼 좋아하는 건 여러 사람과 함께 극장이 아닌 곳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다. 내 ‘영화생활’에 포함되는 건 여러 독립서점에서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것,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뒤 머리와 마음에 남은 잔상들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 그리고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글로 써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미약하게나마 내 글쓰기 경험과 노하우를 전하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에 있어 공간이 주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앞에서 적었다. 그 점에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에 ‘극장이 아닌 곳’은 그 존재 자체로 제약이 된다는 점이다.
극장 상영관에 앉아 관객의 눈앞에서 영화가 시작되면 두꺼운 방음문이 닫히고 내부 조명도 소등된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관객이 스크린에 더 몰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겠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는 극장이 일정한 시간 동안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공간을 벗어나 ‘영화를 보기 위해’ 약속된 공간, 곧 비(非) 일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거의 안 보는 사람이라도 그 이름만은 반드시 아는 영화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올해 2월 미국의 한 영화 시상식에서 “영화제작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관객들에게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motion picture theatrical experience)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크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간접체험을 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라는 말을 했다. 이는 작년 칸영화제 측이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를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받지 않기로 결정한 것에서 촉발된, ‘극장 영화’와 ‘스트리밍 영화’의 경계 논란의 한 연장선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저 발언은, 둘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기보다 ‘극장’에서 누릴 수 있는 경험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에 가깝다. 집에서 보는 영화는 언제든 멈추거나 앞뒤로 되감을 수 있고 ‘딴짓’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일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영화의 세계 안으로 온전히 몰입할 수 없다.
스필버그 감독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만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다면 이 글은 시작되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이 독립서점이나 카페와 같은 공간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보는 모임을 나는 약 4년간 운영해왔다. 한 곳에서만 진행한 건 아니고 서울에서만 몇 군데의 책방들을 거쳤거나 여전히 애용하고 있다. 지금은 월 1회, 건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 사이에 자리한 독립서점인 ‘생산적 헛소리’에서 ‘비밀영화탐독’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모임을 진행 중이다. (나는 공간을 빌려서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이지 서점 관계자는 아니므로, 이 글에서 ‘생산적 헛소리’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이 서점에 대해 궁금한 독자는 <나루 42> 과월호를 확인해보셔도 좋다.)
말했다시피 극장 밖은 극장이 될 수 없으므로, 모임을 할 때 중요한 건 이야기 자체다. 영화의 영상이나 음향 품질이 조금 떨어져도, 빔 프로젝터의 빛이 투사되는 스크린이 그리 크지 않아도 좋다. 저 장면에서 왜 주인공은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생겨나는 건 주로 질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가 끝나야 비로소 찾아낼 수 있다. 앞서 모임 이름을 ‘비밀영화탐독’이라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여러 화두는 누구에게나 저절로 보이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감상하고 생각해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혼자서만 볼 때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답을 찾으려 하면 더 잘 보인다. 이때 유의할 것은, 여기서 찾는 답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내 옆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떤 질문들이 생겨났는지는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모른다. 그래서 비밀이기도 하다. 각자의 비밀을 꺼내보는 시간. 나와 내 옆 사람이 똑같이 ‘재밌었다’라고 말해도, 그 배경은 반드시 다르다. 서로 다른 캐릭터나 장면에 흥미를 느꼈을 수 있고, 똑같은 결말에 대해 반응이나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어느 누구도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해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요컨대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했지만 영화가 끝난 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있었기에, 대화를 나눈 인원만큼의 ‘영화들’이 거기 생겨나는 것이다. 열 명의 사람이 함께였다면 열 편의 영화가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 영화모임을 할 때도 가이드 성격의 발제 자료를 준비한다.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다면 영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같은 감독의 추천할 만한 다른 영화는 또 어떤 작품이 있는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어떤 흥미로운 일이 있었는지, 내가 영화를 통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을 소개하는 동안 모임 참가자들의 표정에는 이따금 공감 혹은 신기함의 눈빛이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골똘히 정리하는 동안의 진지함도 역력하다. 모임에 처음 온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 ‘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구나’ 하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영화 평점 애플리케이션인 ‘왓챠’에 따르면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가 1,360여 편 정도인데, 그동안 극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보다는 주로 ‘이제 어디 갈까?’ 아니면 ‘뭐 먹을까?’ 같은 이야기를 한다. 본질적으로 영화는 웃고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금세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떤 이들은 영화에 대한 심도 있는 생각이나 고민은 평론가나 저널리스트나 하는 일쯤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심지어 비평이 쓸모없는 허세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비평(critic)은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의 영역이지만 리뷰(review)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소셜미디어에, 블로그에, 아니면 나만 보는 일기장에라도. 나 역시 전문 비평가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서 긴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화에 대한 내 견해를 말한다. 제 아무리 검색을 네이버나 구글 대신 유튜브로 하는 시대라 해도, 긴 글을 자기 힘으로 읽는 일을 불필요하다 여기는 시대라 해도, 차분히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스스로의 세계는 더 이상 넓어지지도 깊어지지도 않는다. 나는 감히, 다른 사람이 10분짜리 영상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해놓은 것을 보는 일은 스스로 글을 끼적여보거나 누군가와 그 영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일을 결코 따라오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책 읽는 일도 마찬가지다. 회당 참가비가 몇만 원이 넘는 독서모임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건 숙제처럼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해서도 아니다. 혼자의 생각만으로는 느끼고 깨달을 수 없는 바를 타인으로부터 경험하기 위해서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유지한 채 각자의 생각을 꺼내보고 옆사람의 견해로부터 공감과 통찰을 얻기 위해서다. 그건 물론 영화에도 해당한다. 어떤 사람이 한 영화를 보고 단지 ‘꿀잼’이었다며 며칠 뒤 가볍게 흘려버리는 동안 또 어떤 사람은 거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보고 경험했는지 금세 잊어버리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삶에서 매 순간이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를 더 잘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대학생 때는 대부분 학점이나 동아리 활동, 혹은 아르바이트에 전념하느라 영화모임과 같은 ‘소셜 네트워킹’ 활동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내 모임 참가자 절대 다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 중반의 직장인이다. ‘생산적 헛소리’ 책방이 대학가 한가운데에 자리한 건 대학생에게도 타인과 향유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뜻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한다. 사적인 기준으로는 광진구 내에서도 특히 대학가에 ‘생산적 헛소리’ 같은 지역 문화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중인데, 막연히 지역이나 상권의 한계만을 이야기 할 건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영화나 책에 대해 가까운 사람들과 서로 더 많이 공유하기 시작하면, 그 지역에는 자연스럽게 문화 공간이 하나 둘 늘어나지 않을까. 처음에는 작은 카페일 수도, 나중에는 서점, 나아가 소극장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작품에 대해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같은 말을 하곤 한다. 이 지면을 빌어 영화모임 역시 마찬가지라는 추신을 슬며시 붙여본다. 우리, 서로의 경계를 알맞게 지키며 각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낯선 타인이자 가까운 취향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영화를 통해서.
글 | 김동진
영화의 이야기는 보려고 한 만큼만 보인다고 믿으며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더 좋은 영화를 보고 어제보다 나은 내일의 문장을 쓰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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