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부계정에 불길할 것만 같은 꿈 이야길 한 것과는 달리 주말은 평온했다. 영주는 지난 방문과 달라지지 않았고 가족과의 시간도 평온했으며 인화된 옛 사진들을 다시 꺼냈다. 대체로 1993년부터 96년 사이의 사진들. 자각을 못 할 만한 나이도 아닌데 사진 속의 내가 왜 그 사진 속의 표정을 하고 있는지 거기가 어디인지 같은 건 대부분 연상되지 않았다. 오직 길고 짧은 시간의 흐름들이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의 사이를 실감하게 했고, 여러 장의 사진들을 보고 감상에 젖은 시간 역시 길지는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무궁화호에서 통로석에 앉은 내 앞과 양 옆 사람 모두 책을 읽고 있었다. 바로 옆 사람은 정유정, 나는 장류진. 앞 사람과 통로 맞은편 옆 사람의 책까지는 굳이 살필 이유도 필요도 없었지만 지근거리에 책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묘하게 안심되는 일이었다.
영주에 다녀오는 무궁화호에서,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을 반복해 읽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다 읽고 문학평론가 인아영의 해설과 작가의 말과 <채널예스>의 작가 인터뷰를 읽고 난 뒤 소설을 다시 읽었다. 소설 한 편 한 편도 모두 각별했고 작가의 말도 소중했지만 오늘은 인아영 평론가의 해설 몇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다.
"(...) 이 센스는 타협이라기보다 응전이다. 삭막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쉽사리 생계를 포기할 수 없는 개인이 시스템을 버텨내게 하는 근력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인간에게 더이상 길을 알려주지 않는 시대를 넘어, 별빛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하늘 아래 각자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시대에 봉착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이다. 지금 한국문학에 새롭게 요구되고 갱신되고 있는 것은 감수성이 아니라 센스의 혁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류진의 소설과 더불어 새로운 한국문학 앞에서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게 되었다. 네, 잘 살겠습니다. 잘 살아보겠습니다."
매월 이메일 연재 공지를 올리고 열두 편 남짓의 영화리뷰와 에세이를 구독자에게 보내고 있는데, 나로서도 본인이 쓰는 글이 반드시 값어치를 하는 글일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끔은 영화 선정이 별로일 수 있고 그 영화에 대한 제 서술과 감상이 그리 공감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어쩌면 내 하루는 그리 대단할 것 없을지 모르고 글을 열심히 쓰고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것에만 그칠 수도 있다. 어느 훗날엔가 지금 기록한 이 하루에 대해 1994년도 사진을 들여다보는 지금의 나처럼 생생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오규원) 다만 오늘을 살아보는 일 말고 달리 무얼 할 수 있을까.
김연수는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라고 썼다. (『우리가 보낸 순간 · 시』에서) 이렇게도 썼다.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에서)
부모님의 장식장 한켠에, 내가 쓴 책이 있다.
오늘 영화 한 편을 보고 책 한 권을 읽고 글 하나를 쓴다고 내일 내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오늘 내게 주어진 바는 그것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그래왔던 것처럼 2019년이 지나가고, 2020년도 새롭지 않은 해처럼 살아야겠다. 다만 천천히 꾸준하게.(2019.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