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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22. 2020

청원에 목소리를 보태는 이유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 뿐 아니라

(들고 싶지 않지만) 예를 들어,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도 그것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생각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이언 매큐언, 『속죄』에서)라든가,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지금의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이 말이다."(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라든가. 여러 문장들과 작가의 말들을 떠올렸다.



당장 청원에 나 한 명 보탠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건 당장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텔레그램이 국내 기업이 아니기도 한 데다가 실정법이 어쩌고 뭐가 또 어떻고 하느라. 또한, 이미 기준 수치가 넘어선 이상 숫자 하나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유의미한 결과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아니지만 과정으로 기능한다. 우선 목소리가 한두 명도 아니고 1, 2만 명도 10, 20만 명도 아니고 거기 0이 하나 더 붙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더 큰 목소리가 된다. 예컨대 '고객응대 근로자 보호조치'라는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일이 시행된 것도 일명 '땅콩 회항' 같은 사건들이 불거진 지 4년 만의 일이다. 십수 년 전이라고 소위 '갑질'이 없었을까. 그때는 단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뿐이고 이제는 개인의 목소리가 단체나 사회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이 말하면서 그것이 집단의 경험임이 밝혀지곤 한다. (...) '잘못됐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힘을 잃을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당신이 쓰고 말해야 당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주변에 모인다."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에서)


저녁, 그리고 지금. 불과 몇 시간 만에 청원 참가자가 수십 만 명이 늘었다. 결국 사회를 정말로 바꾸는 건 규범이나 체계나 기술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고 생각이며 목소리겠다. 세상에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많겠지만, 그것이 집단적 꾸준함과 단단함을 갖추었을 때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202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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