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게 바침

by 고요


자유가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 얼른 키우고 어디든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5년만 더, 5년만 더, 그 5년이 지나면 또 5년만 더... 그렇게 스스로

다짐도 하고 위로도 하며 작가는 못 가 본 길이 가장 아름답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지금 가고 있는 길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고 앞만 보고 걸었다.

아는 것도 없었고 달리 방법도 없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멀리만 보이던 정상이

어느덧 눈앞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바라기는 했으나 상상조차 어려웠던

그 일이 드디어 내게도 일어났다.


큰 딸 기준으로는 30년, 밑에 두 녀석 기준으로는 26년쯤 된다.

큰 딸은 진즉 독립을 했고 둘째 녀석은 작년 말이었나? 걱정을 덜었고

막내딸도 인턴 시작한 지 이제 보름이 됐다.

둘 다 여름학기 졸업이라 학업도 끝났다.


아이들 급식할 때 그 당시는 돌아가며 당번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하나 올려 보내면 또 하나, 또 하나 올려 보내면 또 하나...

짬을 내서 학교 다녀오려면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고 어느 날은

이러다간 숨을 못 쉴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괴로울 때도 있었다.

여한 없이 사랑했다.


변진섭의 <새들처럼> 노래가 나오면 늘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 날아가는 새들 바라보며 나도 따라 날아가고 싶어

파란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 따라가고 싶어---

내겐 너무나 간절한 바람이었고 기도였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일 때 서천에 사는 죽마고우 친구가 1박으로 다니러 온 적이 있었다.

둘이 영화 <써니>를 봤다.

같은 세대였지만 문화가 너무 달라 재미는 있어도 공감은 못 하고 있었는데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가 삽입곡으로 나오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

혼자 아이 셋 키우며 수 만 가지의 일을 해 내고 있을 지금의 나를 상상도 못 하고

나름 희망 찬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 내가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하는 눈물이었다.


그러나 늘 감사했고 행복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선택을 하라고 해도

나는 결혼을 할 것이고 아이를 낳을 것이고 인내할 것이다.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다.

다만 그 보다 더 열심히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온 마음을 다 하고 그날 할 일을 미루지 않았다.


며칠 전 아들한테

- 나 축하파티 해 줘~

- 뭔 축하파티?

- 지현이를 끝으로 다 경제적 독립을 했으니까 축하해 줘~

- 밥 같이 먹으면 되나요?

- 그걸로는 부족해. 파티를 해 줘~

- 드레스 입고?ㅎㅎ

현실적인 얘기는 아니어서 웃고 말았지만 진심으로 파티를 하고 싶었다.

막내한테도 얘기했더니

- 오빠한테 해 달라고 해~

한결같은 싸가지~


스물넷에 결혼해서 스물다섯에 큰 딸을 낳고 30년이 지났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불완전했던 그 시절에 내가 가장 잘했던 일은

사람 의지 안 한 것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사는 방법도 다 다르지만

사람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진심을 담아 얘기한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자연을 찬양했고 글을 썼다.

산을 다녔고 가을엔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썼다.

나를 사랑했다.

애인이 돼 주었던 선장님, 수선처가 돼 주었던 키다리 아저씨, 오베 아저씨

나의 영원한 벗이다.


내 청춘은 짧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마로서의 삶이 있었기에

일말의 미련은 없다.

많은 길을 걸어온 지금, 뒤돌아 보며 그 여정의 한 페이지를 마침내 정리한다.





사회 초년생 시절, 입사 동기생들과 휴가 때 동해안으로 여행을 갔다.

강릉으로 삼척으로 안동으로... 우린, 그때 이야기를 제일 좋아하고 자주 한다.

내 청춘의 절정이었던 동시에 마지막 즈음.


늦었지만

애틋하고 찬란했던 내 청춘에게 깊은 감사와 애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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