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는 인격체다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12

by 손안의 우주


악기는 주인과의 인격적 교류를 통해 울림을 얻는 존재다. 장인의 손에서 막 만들어진 타블라는 갓난아기와 같다. 염소 가죽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고 소리는 거칠고 메마르다. 아직 사람과의 교감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어린 악기는 연주자의 지속적인 타격과 망치질, 계절과 날씨의 순환 속에서 건조되고 적셔지며 조금씩 자신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타블라는 단순히 음악을 연주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존재이자 하나의 인격체다.

타블라의 중심에는 ‘시하이(Syahi)’라 불리는 검은 점이 있다. 마치 눈동자처럼 생겨서 악기가 나를 보는 듯한 신비한 느낌을 준다. 철가루와 마살라를 반죽해 가죽에 정성스레 덧붙힌 이 둥근 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이것은 타블라의 심장이다. 연주자의 손가락이 시하이를 스치고 두드릴 때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배음의 세계가 열린다.

타블라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북이지만 단순히 ‘둥’ 소리만 내지 않는다. 심벌즈처럼 맑고 투명한 금속성의 음색도 낸다. 이 독특한 음향적 이중성이 바로 시하이 덕분이다. 철가루가 배합된 시하이는 금속처럼 공진하며, 타블라가 북과 금속 타악기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울림은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는다. 정교한 손끝의 감각, 깊은 집중과 호흡이 필요하다.

금속성과 가죽성이 공존하는 타블라의 음색

인도의 프로 연주자들은 자신이 타블라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블라에게 선택받았다고 믿는다. 타블라의 거장 자키르 후세인은 “내가 타블라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블라가 나를 연주한다”라고 말했다. 악기를 손에 쥔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생명체와 긴 호흡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여정이다.

실제로 고대 인도인들은 악기를 예술의 여신, 사라스와띠(Saraswati)의 현현이라 여겼다. 염소와 나무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일지라도 신의 임재와 선택받은 연주자의 손이 만날 때, 새로운 목소리를 지닌 존재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블라 연주자는 연주하지 않을 때 가죽 위에 조심스럽게 덮개를 씌우고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에 마치 성전의 문을 여는 마음으로 그 덮개를 걷어낸다. 신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인도를 다녀오면 기념품으로 타블라를 산다. 그런데 그 악기들은 대체로 울림이 좋지 않다. 그 이유가 단지 품질 때문만은 아니다. 주인과의 인격적 교류가 없기 때문이다. 몇 번 두드리다 흥미를 잃고 창고에 방치한다. 생명과의 접촉이 끊어진 악기는 죽은 사람의 몸이 서서히 굳어가듯, 그 생기를 잃는다.

나는 그런 타블라들을 헐값에 사서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적이 많다. 그 과정은 강한 인내를 요구했다. 아무리 연주하고 튜닝해도 처음 몇 달간은 울림이 없다. 마치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이가 말문을 닫은 것처럼. 그러나 손끝으로 생명의 기운을 계속 전하면 언젠가 이 친구도 마음을 연다. 움직이지 않던 가죽 위에 어느 날 갑자기 배음이 감돌고 울림이 살아난다.

일반적인 서양악기들과는 다르게 튜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금 음정을 B에서 D로 올리고 싶다면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천천히 가죽을 당겨야 한다. 마치 도수치료사가 굳은 몸을 서서히 풀어내듯이 해야 한다. 타블라는 기계가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이며 감각과 반응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무리하게 당겼을 때의 결과..

이 사실을 알지 못해 나는 공연을 망친 적이 여러 번 있다. 야외 분수대 앞에서 공연을 한 어느 날이었다. 무대는 분수에서 꽤 떨어져 있었지만 미세하게 흩날린 물방울이 가죽을 축이기엔 충분했다. 그날은 C# 키로 연주하기로 시타르 연주자와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타블라의 음정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0월 중순의 밤공기는 빠르게 차가워졌고 온도까지 떨어지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가죽을 아무리 조여도 소리는 금세 다시 풀려버렸고 그때부터 불안과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한 음정, 완벽한 연주. 나는 그날도 여전히 내 직업적 의지를 관철하고 있었다. 타블라가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음정을 끝까지 끌어올리려 했다. 결국 공연은 그렇게 우왕좌왕 끝났고 내 안의 음악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음악을 통제하려 하려고 했다. 연습과 무대는 동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완벽주의가 오히려 음악을 망친 날이었다. 그때 조금 더 타블라에 대한 깊은 앎이 있었더라면 악기의 상태와 요구를 받아들이고 시타르와 함께 음을 낮춰 유연한 흐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날은 타블라가 그 음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는 듣지 않았다. 악기가 침묵하는데 나 혼자 소리를 내려 아우성쳤던 날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나는 악기를 내 뜻대로 조율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였는지를 배웠다. 내가 아무리 정성껏 조율하더라도 끝내 D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이 악기가 내는 소리, 이 음정이 바로 지금 이 친구가 머물고 싶은 자리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내가 음악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소리를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 생명과 함께 머무는 청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타블라는 그렇게 나를 낮췄다.

물론 서양음악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관점이다. 고전음악부터 현대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음정을 정확히 고정하고 변수를 제거해 어떤 경우에도 의도한 소리가 발생되도록 한다. 악기는 그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이며 연주자는 기술을 통해 예측 가능성과 정밀도를 추구한다. 그러나 인도음악은 다르다. 그날의 기온과 습도, 손의 감각과 악기의 기분에 따라 소리는 유동한다. 오늘의 음은 어제의 음과 다르고 내일의 음은 또 다를 것이다. 이 유동성 안에서 연주자는 자신의 뜻을 꺾고 악기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통제가 아니라 관계, 관철이 아니라 공존, 그것이 타블라의 울림이 머무는 자리다.

이러한 태도는 음악 안에서만 요구되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인도라는 사회 전체의 리듬과 닮아 있다. 인도의 시스템은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느릿느릿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관공서의 처리 속도, 거리의 교통 체계, 약속 시간의 개념마저 모든 것이 지연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느림 안에는 다른 시간 감각이 숨어 있다. 예측 불가능성과 혼돈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흐름에 몸을 맡기며, 기다림 속에서 관계를 지켜내는 방식, 그것이 인도 사람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질서다. 인도음악은 바로 그 삶의 리듬에 조응하며 발전해왔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산업의 구조에서는 유동성과 즉흥성은 오류로 간주된다. 악기의 감정, 연주자의 내면, 오늘의 기운 같은 것들은 고려되지 않는다. 오직 표준화된 소리, 예측 가능한 퍼포먼스만이 프로페셔널로 여겨진다. 악기의 기분 따위는 사치로 여겨지고 연주자는 철저히 성과의 논리에 복무한다.

한국에서 타블라를 연주한다는 건 단순히 이국적인 악기를 다룬다는 뜻이 아니다. 타블라 연주는 단순한 음악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선언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에 몸을 담그는 일이고 서구적 음악 산업이 전제하는 효율성과 통제의 구조에 대해 조용히 질문을 던지는 행위다. 무대와 사회, 음악과 사람을 연결하는 혁명적 태도다.

오늘날의 음악 시스템은 악기를 도구로, 연주자를 기능인으로, 음악을 상품으로 본다. 그러나 타블라는 그 모든 구조에 이의를 제기한다. 나는 이 악기 앞에 설 때마다 단지 연주자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에게 타블라는 더 이상 북이 아니다. 타블라는 스승이다. 타블라는 관계의 방식이며,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고, 음악으로 수행되는 작고 조용한 혁명이다.

글/정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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