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과 현실 사이에서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20

by 손안의 우주


현대의 명상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티베트와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계통의 명상이다. 이 흐름은 초월적 의식, 확장된 자아, 일상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지향한다. 명상은 현실을 잠시 벗어나 더 높은 의식 상태로 도약하기 위한 통로다. 다른 하나는 선불교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명상 전통이다. 이쪽에서는 현실과 초월을 나누지 않는다. 특별한 상태로 가는 것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의 행위와 알아차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깨달음은 다른 세계에 있지 않고 밥을 먹고 물을 긷는 그 순간에 이미 깃들어 있다는 관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사회와 서구 사회 모두, 전자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초월적 의식을 지향하는 명상은 설명하기도 쉽고 성취의 단계로 제시하기도 좋다. 깊은 체험, 특별한 감각, 이전과는 다른 나라는 서사는 매력적이다. 물론 그 세계가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초월적 의식의 차원은 분명 존재하고 실제로 강력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다만 그 방향으로만 명상이 이해될 때 명상의 실전성은 종종 약화된다. 명상은 일상의 기술이 아니라 일상과 분리된 특별한 시간으로 밀려난다. 연주와 노동, 관계의 현장에서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오고 만다.


반대로 동아시아적 명상관에서는 초월을 따로 떼어내지 않는다. 특별한 상태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화려한 체험은 적을지 몰라도 행위 하나하나가 곧 수행이 된다.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이 화투를 치는 방식이나 다도 수련자의 손놀림이 그 좋은 예다. 그들에게는 ‘지금 이건 명상이고, 저건 현실’이라는 구분이 없다. 화투를 치는 순간이 곧 수행이고 차를 끓이는 행위 자체가 명상이다.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사라질 때, 초월은 저편에 있지 않고 이 자리에서 조용히 발생한다.


타블라 연주는 이 두 갈래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인도 고전 음악이라는 전통 안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타블라는 분명 초월적 의식 세계와 맞닿아 있다. 리듬은 단순한 시간의 분할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연결된 구조로 이해된다. 연습은 기술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의식을 정렬하는 과정에 가깝다. 동시에 타블라는 철저히 손의 감각, 몸의 미세한 조정, 반복되는 일상의 연습 속에서만 살아난다. 한 음 한 음을 정확히 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손끝에 내 의식이 완전히 들어와 있어야 한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그래서 타블라를 연습한다는 것은 초월을 지향하면서도, 그 초월을 일상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깊이 들어가되 도망치지 않고, 몰입하되 떠나지 않는다. 연습이 잘되는 날, 연주자가 느끼는 그 이상한 평온함은 특별한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타블라 사이의 경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연습은 수행이 되고, 수행은 다시 생활로 돌아온다.


명상의 실전성이란 이 두 세계를 통합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초월을 인정하되, 초월에 매달리지 않는 것. 특별한 상태를 경험하되, 그 상태를 목표로 삼지 않는 것. 타블라를 치는 순간, 나는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블라를 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명상은 가장 정확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글/정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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