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덫에 가두면⟫•태 켈러
눈에 띄는 점은 태 켈러(Tae Keller) 작가의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특별함이 책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것이다. 심각한 병을 진단받은 우리 할머니, 엄마와 나 그리고 언니는 할머니 집에서 치료차 머물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겪는 일들이 책의 전체 줄거리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설화의 힘’, ‘정체성의 성찰’, ‘가족의 발견’ 등 익숙하지만 그립고 정겨운 감정이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치매를 겪는 가족의 안타까운 현실과 호랑이와 만나서 할머니의 과거와 나의 정체성을 깨닫는 ‘현실 같은 상상’은 서로 대비되면서 독자들에게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꿈같이 몽롱하고 묘한 느낌의 환상은 단순할 수 있는 현실 서사의 깊이를 더해 준다.
책에서 등장하는 ‘호랑이’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들이 겹쳐있다고 생각한다. 심리적인 두려움, 사나운 짐승, 신화의 주인공과 같은 표면적인 느낌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의 정체성’, ‘이야기의 힘’, ‘여성의 강인함’, ‘자아 성찰의 기제’ 등 보다 중의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할머니의 과거와 릴리의 성장을 연결시켜 주는 하나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할머니의 아픈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해주며 항상 유쾌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할머니, 하지만 내면에 숨어있는 '그림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오직 릴리만이 보고 있었다. 상상 속이지만 호랑이를 보는 존재는 릴리가 유일했다.
인생을 살면서 꿈처럼 애매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런 경험들로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다. 그리고 복잡 미묘했던 순간들이 새롭게 다가오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성장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도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꿈과 상상 그리고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상상 속에서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 현실에서 이루어기도 하고, 현실에서 염원했던 일들이 꿈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흔했다. 어쩌면 꿈과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해지면서 철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자아의 성장은 이렇게 내 주변의 경계선을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성장’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전체 서사는 화자이자 주인공 릴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의 고민이 릴리에게 투영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다. 정체성이란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때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각 국가의 설화이기도 하다. 이렇게 호랑이 설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을 저자도 이민 3세로 살면서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을 아름답고 따뜻한 문체와 문장으로 승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읽어볼 근거는 충분하다.
릴리가 할머니가 사는 동네로 이사 온 후로 수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 할머니와 이별을 미루려 '호랑이 덫'을 만들거나 이야기 병도 깨뜨리지만, 결국 릴리는 할머니와의 '영원한 작별'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체성도 확인한다. 그래서 처음 가족과 할머니에게로 온 것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할머니와의 작별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릴리가 언니와 나누는 대화는 이 책의 ‘백미’이다. 책 전체에 흐르고 작가의 생각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슬픔은 한계가 명확한 것, 점점 줄어드는 것, 0에 수렴하는 개념, 망각이 가능한 것, 오래될수록 잊히는 감정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그리움은 영원한 것, 무한대에 가까운 개념, 시간과 무관한 것, 통제 불가능한 개념, 망각이 불가능한 것, 오래될수록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둘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움의 시작에는 대부분 슬픔이 존재한다. 그리고 슬픔의 끝은 다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슬픔은 희미해지지만 그리움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은 아마도 그런 뜻일 것이다.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지, 이민 3세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가족에 관한 이야기인지 독자의 시선에 따라 이 책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 우리의 인생도 순차적 직렬연결 방식의 1차원 함수가 아니라, 수많은 사건과 과정이 복잡하게 얽히고 섞인 입체적 병렬연결 방식의 고차원 함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장과 정체성, 친구와 가족, 삶과 죽음은 따로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변하고 발전하고, 결국 이런 과정이 인생이 된다. 릴리의 이야기가 내 과거 이야기처럼 친근하고 진실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또 다른 해답을 찾고 있다면,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거나 용기가 부족하다면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슬픔은 희미해져. 응, 결국에는, 그런데 그리움은…… 시간이 지난다고 없어질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 이 대화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떠나보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고등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때 직면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이별이 생각났다. 누군가와의 '영원한 이별의 경험'은 그 사람의 내면적인 성장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작별과 애도를 통해 성장한다. 이 책의 저자는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주 가만히 있는다. 마치 아픔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진실이 호랑이이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호랑이가 날 찾을 수도 있는 것처럼
▶︎ 릴리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지금이 꿈이 되고, 좀 전의 꿈은 현실이 되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에 리키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나 같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 내가 해 온 일이 바로 그것이다. 내 테두리를 밖으로 밀어내 내 한계선에 어디까지인지 알아내는 일.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나에게 한계가 없다고 느낀다.
▶︎ 성장은 누구나 겪는 과정이다. 또한 그 과정을 어떻게 지나가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난했던 성장의 과정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만이 또 다른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어른을 위한 청소년 소설
이런 분께 추천드려요!
호랑이를 좋아하는 분
따뜻한 판타지 소설이 취향인 분
가족과 성장에 관심이 많은 분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저자 : 태 켈러
번역 : 강나은
출판 : 돌베개(2021)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