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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Dec 02. 2023

식민지를 살았던 작가

⟪이상 소설 전집⟫•이상

1.

이 책의 전부를 읽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날개⟫가 다시 읽고 싶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이상의 ‘날개'가 읽고 싶었다. 굳이 읽고 싶었던 이유를 말하자면 한국인 작가의 글을 읽고 싶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버텼던 작가의 글을 읽고 싶었다. 필자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한국'이라는 국적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우리는 모두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지만, 21세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가족의 형태, 신체적 조건, 성별 등의 생물학적 요소뿐만이 아니라 국적, 경제적 여건, 태어난 시기와 같은 사회적 요소도 '나'의 의사와 무관하다.


특히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느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일제강점기는 외면하고 싶지만 기억해야 하고, 무섭고 두렵지만 자랑스러운 이상한 정체성이다.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넘어서 양자역학적이다. 이러한 시대를 직접 살아보지 않은 지금의 우리들도 이런 설명하기 힘든 압박에 시달리는데 당시를 살던 사람들, 특히 글을 쓰던 작가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이상은 박제된 천재가 되기로 한 것은 아닐까? 요즘 말로 태어나 보니 흙수저, 이상 작가는 태어나 보니 식민지였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현재의 우리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상처받았고 한편으로 무엇인가 깨닫고 있다.


이상의 삶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천재 혹은 혹독한 시절임에도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졌던 작가. 반대로 민족적 고난에 동참하지 않은 방관자 아니면 자기 내면에 빠져 공감하기 어려운 글만 조각했던 외골수. 어떤 평가를 하던 이상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사람이 없는 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그 누구도 진실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우리에게 읽을만한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억하는가? 모든 게 싫었던 학창 시절 교과서에 만났던 ⟪날개⟫는 신기하게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글 속에 주인공도 (그때의) 나와 비슷하게 답답하고 막막해 보였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1936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시대적 한계에 서 있는 이상 자신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처 없이 방황하던 지식인들을 지칭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습은 유쾌하다. 시대도 자기 자신도 이런 상황마저 슬픔과 분노를 넘어 유쾌할 뿐이다.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가소로운 변명으로 이런 상황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그 끝에 새어 나오는 무기력한 조소는 막을 길이 없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자 식민지라는 현실에 대한 비웃음이다. 봉준호 감독을 '삑사리'의 예술가라 부르기도 한다. 부조한 세상에 날카로운 조소를 날리던 그의 영화 속 풍자는 결정적 순간마다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이런 맥락에서 두 예술가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무리일까.


조지 오웰도 예측했지만,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로 점철된 절대권력의 강력한 통제는 개인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지는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2023년 현재, 한국에서 일상을 보내는 우리는 식민지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과연 진정으로 독립을 이루었는지는 미지수이다. 명목상 국가적 차원의 독립은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개인 차원에서 많은 부분이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완벽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고 본다. 과거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상의 고민이 담긴 글은 충분히 다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식민지는 국가 단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정서적 식민지도 있다.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배척하면 그게 바로 마음의 식민지다.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쓸쓸함, 비슷한 외로움을 느꼈을 이상. 그래서 ⟪날개⟫를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화적 탄압과 구속에서 한글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하다. 희망찬 미래도, 잔악한 복수도 머릿속 관념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는 현실은 무기력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날개를 달고 날아보자는 쓸쓸한 외침은 전적으로 거대 담론에 기댄 ‘독립’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날개⟫를 통해 그렇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 모습에서 '박제가 된 비참한 천재'를 발견하고 이를 글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기 내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허무한 메아리만 남는 현실, 자신을 껍질만 남은 박제처럼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2.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 설국,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독자들을 저자가 창조한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적인 문장이다. 박제된 천재는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날고 싶다.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가 그럴 대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면서 도적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 가장 슬픈 것은 그의 판단마저도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의심도 변명도 자기가 다 해버린다. 그의 생각에 아무도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결국, 그의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 ‘나’는 백화점 옥상에서 내려온 다음에 이러한 (가려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 상황을 겪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자살이 아니라 정말로 날아오르고 싶은 희망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을 본 것이다.



3.

일제 강점기, 작가의 삶


이런 분께 추천드려요!

한국 소설을 읽고 싶은 분

고민에 빠진 분

이상의 문체가 그리웠던 분


이상 소설 전집

저자 : 이상
책임 편집 : 권영민
출판 : 민음사(2012)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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