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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은 프롤로그

by COSMO

소프트웨어 개발에는 '버전 1.0'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있다. 기획부터 개발, 수없는 테스트를 거쳐 세상에 처음 내놓는 정식 출시 버전을 뜻한다. 2023년 가을, 나는 《비교리즘》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내 인생의 버전 1.0을 완성했다고 믿었다. "비교는 나쁜 것이 아니다.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명징한 도구다." 책에 담긴 문장들은 논리적이었고, 결론은 명쾌했다. 나는 이제 비교 따위로 고통받지 않는, 완벽하게 디버깅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책이 서점에 깔리고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새벽 2시의 눅눅한 이불속에서 타인의 성취와 나의 초라함을 저울질하며 괴로워했다. 머리로는 비교의 유용함을 알았지만, 가슴은 여전히 질투라는 에러 메시지를 뿜어댔다. 독자들에게는 비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라고 설파해 놓고, 정작 저자인 나는 비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순. 그 부끄러운 불일치가 나를 이 글쓰기의 현장으로 다시 불러냈다.


엔지니어링의 세계에서 버전 1.0의 출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실제 사용 환경에 놓이는 순간, 실험실에서는 보이지 않던 수만 가지 변수와 버그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전작 《비교리즘》이 비교의 원리를 설명한 '사용 설명서'였다면, 지금 쓰고 있는 이 이야기들은 그 설명서를 읽고도 여전히 흔들리는 당신과 나를 위한 '패치 노트'다. 이론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의 오류들을 수정하고, 시스템을 최적화해 나가는 구체적인 수정 기록이다.


우리는 지난 에피소드들을 통해 몇 가지를 확인했다. 삶의 초기값은 0이 아니다. 각기 다른 기울기를 가진 채 출발한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다. 플레이어의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개발자의 냉철함이 함께 있어야 한다. 지식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모름의 해안선도 길어진다. 무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탐험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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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은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었다. 비교의 해상도를 높이는 작업이었다. 흐릿하게 뭉개져 있던 열등감이라는 덩어리를 픽셀 단위로 쪼갰다. 그것이 사실은 존경심이었는지, 혹은 방향 설정의 오류였는지. 정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분석을 바탕으로 더 깊은 관계의 숲으로 들어간다. 질투를 존경으로 바꾸고, 비겁한 변명을 정중한 사과로 치환하며, 타인의 평가가 아닌 나만의 인정을 찾아가는 여정이 남아있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완벽한 버전'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며, 비교라는 알고리즘은 우리 DNA에 너무나 깊게 코딩되어 있기 때문이다. (버그 없는 소프트웨어가 없듯, 상처 없는 성장은 없다.) 하지만 그래서 멈추지 않고 업데이트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타인의 화려한 결괏값이 아니라 나의 충실한 과정값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책은 전작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혹은 알면서도 외면했던 비교의 디테일한 그림자들을 다룬다. 1.0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넘어진 흔적들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를 훈장처럼 드러내며 2.0으로 나아가는 기록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안심하기를. 당신이 느끼는 박탈감과 불안은 시스템 오류가 아니다. 다음 버전으로 넘어가기 위한 업데이트 알림이다.


이제 다시 모니터 앞에 앉는다. 비교라는 오래된 도구를 다시 벼린다. 나를 베는 칼이 아니라, 나를 조각하는 정으로 쓰기 위해서. 못다 한 이야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우리의 패치 노트는 계속 쓰여야 한다. 당신과 나의 시스템이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한. (아직 치명적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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