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찰열의 쓸모

질투와 존경

by COS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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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지면 서재는 거대한 심판대로 돌변한다. 낮 동안의 소음이 잦아들고 오직 나와 책장만이 남은 시간, 꽂혀 있는 거인들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나는 피고석에 앉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다. 유시민의 책을 펼치면 그가 가진 지식의 명징함과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 건축술에 압도당한다. 그는 난해한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투명한 집을 짓는다. 칼 세이건의 문장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우주적 깊이와 인문학적 지성이 결합한 숭고함 앞에 숨이 막힌다. 그는 차가운 별의 데이터를 인간의 뜨거운 혈액으로 번역해 내는 마법사다. 리처드 도킨스는 또 어떤가. 그의 냉철한 이성과 도발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문장들은 내 얄팍한 사고의 밑바닥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한강. 인간 본연의 고통과 폭력을 저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리면서도, 결코 소리 지르지 않고 담담한 언어로 꾹꾹 눌러 담는 그 필력을 마주할 때면, 나는 쥐고 있던 펜을 조용히 내려놓게 된다. 그들의 문장은 너무나 완벽해서, 감히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이때 질문은 화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정말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을까? 저들처럼 단 한 권이라도, 아니 단 한 문장이라도 세상에 남길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자문할수록 돌아오는 대답은 냉소적이다. 타인의 탁월함을 보며 "축하해" 혹은 "대단해"라고 말하면서도, 명치끝 한쪽이 뻐근하게 저려오는 이 감각은 정직하다. 의심은 질투가 되고, 질투는 다시 두려움이라는 짙은 안개를 만든다. 거인들의 성취가 영감이 아니라 내 초라함을 비추는 거울이 될 때, 나는 글쓰기라는 광막한 우주에서 길을 잃는다. 그들의 탁월함이 나를 고무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마비시키는 이 역설적인 통증. 작가라고 불리면서도 정작 남의 글을 읽으며 이불을 걷어차는 이 꼴이라니, 참으로 인간적이고도 비겁한 일이다. (그래도 이불은 다시 덮는다. 새벽은 춥다.)


우리는 흔히 질투는 숨겨야 할 추한 감정이고, 존경은 지향해야 할 고결한 덕목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감정의 층위에서 이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기준이 흔들릴 때, 내 시스템이 가장 먼저 내지르는 비명이기 때문이다. 이 신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나라는 엔진의 수명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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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차 엔지니어의 차가운 눈으로 이 지독한 뜨거움의 정체를 분석해 본다. 나는 질투를 '폐쇄 루프 내에서 발생하는 마찰열'이라고 정의한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르면 시스템에 입력된 에너지는 일을 하거나 열로 방출되어야 한다.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거인들의 에너지를 내 안으로 입력받았다면, 그것은 나의 문장이라는 출력물로 전환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질투에 빠진 시스템은 출구를 찾지 못한다. "나는 왜 저들처럼 못 쓰는가?"라는 자책은 외부로 나아가는 운동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시스템 내부에서만 맴돌며 나라는 부품을 갉아먹는다.


질투는 철저히 상대의 '존재'와 그가 이미 내놓은 '결괏값'이라는 고정된 데이터에만 집착한다. "유시민은 천재니까", "한강은 노벨상을 받았으니까"라는 식의 사고는 답이 없는 연산이다. 그들의 존재와 성취는 내가 통제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수정할 수 없는 변수를 상수에 놓고 계산을 돌리면, 시스템은 무한 루프에 빠진다. 에너지가 갈 곳을 잃으면 결국 열로 변한다. 기계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마찰열이 베어링을 녹이고 엔진을 멈추게 하듯, 질투라는 열기는 자존감이라는 부품을 변형시키고 사유의 회로를 태워버린다. (기계라면 경고등이 켜졌을 텐데. 인간은 본인이 과열 중인지도 모른다.)


질투의 알고리즘은 타인을 도구 삼아 나를 고문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공정이다. 내가 빛나기 위해 상대의 불을 끄고 싶어 하거나, 상대의 밝기에 눈이 멀어 정작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기계를 만지며 배운 진리가 하나 있다면, 마찰열을 방치하는 시스템은 반드시 붕괴한다는 사실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거인들을 질투하며 보내는 새벽 2시, 내 문장은 단 한 줄도 전진하지 못했다. 질투는 감정의 결함이 아니다. 내 에너지의 방향이 틀어졌음을 알리는 강력한 경고음이다. 지금 내 시선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왜 이토록 뜨겁게 달궈졌는지 확인하라는 시스템의 구조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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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연산자를 살짝 틀어본다. 질투를 존경으로 치환하는 순간, 닫혀 있던 폐쇄 루프는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개방형 시스템으로 전환된다. 나는 존경을 엔지니어링 용어로 '역설계'라고 부른다. 완성된 제품을 분해하여 그 안에 담긴 설계 로직과 제조 공정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질투가 완성품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주눅 드는 것이라면, 존경은 그 제품을 뜯어보며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라고 호기심을 갖는 것이다. 한강의 문장을 보며 질투하는 대신, 그녀의 공정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 고요한 슬픔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형용사를 버렸는지. 어떤 조사를 선택했는지. 유시민이 복잡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비유를 설계했는지 뜯어보고,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적 사실을 문학적 은유로 치환할 때 사용하는 변환 함수를 찾아낸다. 칼 세이건이 차가운 우주에서 따뜻한 휴머니즘을 추출하는 논리 회로를 추적한다.


시선을 '결과'에서 '과정'으로 옮기는 순간, 거인들은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내가 참고해야 할 공개 설계도가 된다. 질투와 존경은 나보다 나은 데이터를 발견했다는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둘 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즉 내 욕망의 좌표를 정확히 비춘다. 차이는 에너지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질투가 타오르는 불이라면, 존경은 그 불을 보일러 속에 가두어 고압의 증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 증기는 나라는 시스템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존경은 질투와 달리 상대를 통해 배울 거리를 수집하고 내 성장의 연료로 삼는다.


"저들은 어떻게 저곳에 도달했는가?"라는 질문이 "나는 내 궤적에서 어떤 로직을 수정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과제로 바뀔 때, 마찰열은 비로소 추진력으로 변한다. 결과물에 매몰되지 않고 그들의 고뇌와 반복된 훈련의 흔적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과 대화할 자격을 얻는다. 거인들의 어깨 위가 높아서 무섭긴 하지만, 거기서만 보이는 풍경이 분명히 있다. 그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그들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질투가 아니라, 그들의 어깨까지 기어올라가는 존경의 근력이 필요하다.


질투를 존경으로 바꾸는 순간,
타인은 나의 적이 아니라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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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질투와 존경은 나라는 시스템이 가고 싶어 하는 목표 좌표를 가리키는 정밀한 신호다. 아무런 욕망이 없는 기계는 과열되지 않듯, 질투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당신이 누군가의 지성에 열등감을 느끼고 누군가의 필력에 뼈저린 질투를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의 내면이 그만큼 높은 해상도의 문장을 갈망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아무런 뜻이 없는 사람은 유시민을 봐도 감흥이 없고, 한강을 봐도 그냥 지나친다. 당신이 멈춰 서서 괴로워한다는 것. 그것은 당신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이 당신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질투를 숨기기보다 그 안에 숨은 내 욕망을 정직하게 독해해야 한다.


성공한 작가들의 책, 혹은 당신을 앞서가는 동료의 성과는 당신을 좌절시키기 위한 증거물이 아니다. 당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설계도다. 당신의 다음 버전을 미리 보여주는 베타 테스트 모델이다. 질투의 열기로 자신을 태우는 대신, 존경이라는 렌즈로 그들의 사유를 굴절시켜 내 것으로 흡수해야 한다. 탁월함을 알아보는 당신의 눈이 이미 그들과 같은 궤도에 올라와 있음을 믿어야 한다.


거인들을 시기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아, 내 시스템이 다음 업데이트를 준비하고 있구나. 과부하가 걸릴 만큼 내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구나. 이 뜨거운 마찰열을 식히는 방법은 단 하나,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아 내 몫의 문장을 한 줄씩 적어 내려가는 것뿐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그 시간에 차라리 그들이 쓴 문장 하나를 필사하고, 그들이 썼던 단어 하나를 내 노트에 적어 넣는다. 그것이 에너지를 보존하고 나를 지키는 유일한 물리 법칙이다. 이 뜨거운 에너지를 그냥 공중에 흩뿌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연료비가 얼만데.)


우리는 모두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각자의 별을 찾는 항해자들이다. 질투를 존경으로 바꾸는 순간, 타인은 나의 적이 아니라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된다.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 때마다 나는 세이건의 별을 보고 도킨스의 논리를 빌려온다. 그들의 문장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내가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돕는 양력이다. 질투는 여전히 불쑥불쑥 찾아오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보일러 밸브를 열기로 했다.


이제 다시 책장을 본다. 거인들의 이름은 더 이상 나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궤도에서 빛나며 나에게 속삭인다. 너의 문단에도 너만의 알고리즘이 있다고. 너만의 언어로 너만의 우주를 설계하라고. 나는 기꺼이 그들의 문장을 탐독하며 내 시스템의 버그를 수정한다. 질투라는 노이즈를 걷어내고 존경이라는 깨끗한 신호를 수신하는 일. 그것이 내가 작가라는 미지의 영토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존경의 지도가 나를 더 오래 걷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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