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에 꽂힌 독립의 무게

4대 보험 고지서와 야생의 매운맛

by COSMO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생긴 새로운 강박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층 로비로 내려가 우편함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직장인 시절, 퇴근길에 마주치는 우편함은 그저 귀찮은 쓰레기통의 연장선이었습니다. 배달 음식점 전단지, 동네 마트 세일 안내문, 전 세입자 앞으로 온 정체불명의 우편물이 쌓여 있는 방치된 공간이었죠. 가끔 관리비 고지서나 신용카드 명세서가 날아오긴 했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모바일 청구서로 바꾼 지 오래였기에 우편함은 한 달에 한 번 열어볼까 말까 한 먼지투성이 사각 통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라는 거대한 온실을 제 발로 뛰쳐나온 지금, 우편함은 더 이상 방치된 공간이 아닙니다. 매달 서늘한 경고장이 도착하는 야생의 최전선입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 들고 오던 길이었죠. 습관처럼 우편함을 들여다보았는데, 텅 비어 있어야 할 제 칸에 빳빳한 창문형 봉투 두 개가 꽂혀 있었습니다.


봉투의 겉면에는 굵고 근엄한 궁서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그리고 국민연금공단.


순간, 손에 든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습니다.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프리랜서 전업 작가를 선언하며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졌다고 환호했던 저에게, 국가가 너의 현실을 직시하라며 보내온 청구서였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들고 방구석으로 돌아왔습니다. 늘어난 곰돌이 수면 바지를 입은 채로 식탁에 앉아, 시한폭탄을 해체하는 심정으로 봉투의 절취선을 뜯었습니다.


그리고 종이를 펼쳐 든 순간,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엔지니어의 논리 회로가 정지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숫자야? 공단에서 0을 하나 잘못 붙인 거 아니야?


청구서에 찍힌 금액은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적인 숫자였습니다. 직장 생활 13년 동안 매달 월급 명세서에서 공제액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떨어져 나가던 그 금액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직장인 시절,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유리지갑이라고 부르며 투덜거렸습니다.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며 매달 분통을 터뜨렸죠.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그것은 온실 속 화초의 배부른 투정이었습니다.


직장가입자일 때는 4대 보험료의 절반을 회사가 부담해 줬습니다. 게다가 보험료 책정 기준도 오로지 저의 근로 소득 하나뿐이었죠. 월급쟁이들은 투덜대면서도, 사실 회사라는 거대하고 따뜻한 방패 뒤에 숨어 국가의 징수로부터 반쪽짜리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사직서를 던지고 지역가입자라는 이름의 야생으로 쫓겨난 순간, 그 튼튼했던 방패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지역가입자의 건강보험료는 소득뿐 아니라 전세 보증금, 중고차, 가족 수까지 탈탈 털어 청구됩니다. 거기에 회사가 내주던 절반의 부담금까지 고스란히 제 몫으로 돌아왔으니, 납부할 금액이 훌쩍 뛰는 것은 수학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고도 서글픈 결과였습니다.


저는 청구서를 쥔 채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회사에서 매달 제 통장에 꽂아주던 따박따박한 월급이 얼마나 큰 위력이었는지, 인사팀과 재무팀이 이 복잡한 세금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며 방패막이가 되어줬는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상사의 잔소리가 싫어서, 매일 아침 지옥철을 타는 게 지긋지긋해서 내 발로 울타리를 걷어차고 나왔습니다. 완벽한 자유를 얻었다며 아침 9시에 넷플릭스를 보는 사치를 누렸죠. 하지만 그 달콤한 자유의 영수증이 이렇게 무거운 숫자로 날아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습니다.


이 무거운 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 고지서를 막으려면, 도대체 매달 몇 편의 글을 더 써야 하는 걸까. 얼마 전 외주처 담당자에게 완전 한가합니다라며 꼬리를 흔들고 받아온 소중한 원고료의 상당 부분이, 이 종이 쪼가리 두 장으로 허무하게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마감 요정에게 멱살 잡혀가며 모아둔 밥값이 국가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압수당하는 기분입니다.


이쯤 되니 바쁘신가요?라는 클라이언트의 카톡은 단순한 생명수를 넘어, 제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줄 유일한 동아줄입니다. 자본주의의 쓴맛을 넘어 국가 징수 시스템의 매운맛까지 본 프리랜서의 영혼은 너덜너덜해졌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억울하다고 공단에 전화를 걸어 저는 방구석 유배자입니다! 곰돌이 수면 바지를 입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영혼이란 말입니다!라고 외쳐본들, 돌아오는 건 차가운 기계음의 안내 음성뿐일 겁니다.


독립이란 알람을 끄고 늦잠 잘 권리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날아오는 모든 청구서를 온전히 내 힘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무서운 책임감이었습니다.


저는 청구서 두 장을 접어 모니터 하단에 테이프로 붙였습니다.


글이 안 써져서 유튜브 알고리즘의 유혹에 빠지려 할 때마다, 혹은 침대에 누워 달콤한 낮잠을 자고 싶어질 때마다 이 서늘한 청구서를 보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입니다. 저 궁서체로 적힌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는 글자보다 더 확실하고 강력한 마감 독촉장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과거의 저를 지켜주던 따뜻한 온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제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타자만이 저를 먹여 살리고, 국가의 무거운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모니터 앞에 바짝 다가앉아 식어빠진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켭니다.


슬퍼할 시간도, 과거를 그리워할 시간도 없습니다. 오늘 당장 건강보험료 할당량을 채우려면 키보드에서 불이 나도록 타자를 쳐야 하니까요. 세상의 모든 프리랜서 동지들, 이번 달도 묵직한 고지서의 무게를 꿋꿋하게 견디며 부디 무사히 살아남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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