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바쁘신가요?

꼬리 흔드는 방구석 대기조

by COSMO

직장인 시절, 제 모니터 우측 하단에는 늘 사내 메신저 창이 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그 노란색 아이콘은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 같았죠. 그중에서도 저를 가장 공포에 떨게 했던 메시지는 단연코 이 다섯 글자였습니다.


"혹시 바빠요?"


이 질문은 결코 안부를 묻는 다정한 인사가 아닙니다. 13년간 엔지니어로 구르며 체득한 빅데이터에 따르면, 저 다섯 글자 뒤에는 반드시 누군가 싸다 만 똥, 혹은 기한이 내일인 업무 협조 요청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바빠요?"라는 팝업이 뜨는 순간, 제 뇌는 슈퍼컴퓨터보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안 바쁘다고 하면 내 퇴근 시간은 밤 10시로 밀리겠지. 그렇다고 대놓고 바쁘다고 하면 건방지다고 찍힐 텐데. 찰나의 고민 끝에 저는 늘 외교적인 모범 답안을 보내곤 했습니다. "아, 과장님. 제가 지금 막 급하게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있어서요. 혹시 어떤 일 때문이실까요?"


내가 얼마나 바쁜지, 내 시간이 얼마나 금쪽같은지 증명하려고 온갖 전문 용어를 섞어 방어막을 쳤습니다. 남의 일을 떠맡지 않기 위한 직장인의 눈물겨운 생존 본능이었죠.


남의 시계에 맞춰, 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게 지긋지긋해서 사표를 던졌습니다. 더 이상 모니터 우측 하단에서 팝업창이 깜빡일 일도 없고, 누구에게도 억지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완벽한 자유의 세계로 제 발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프리랜서가 된 지금, 제 방구석에는 완벽한 정적이 흐릅니다.


지긋지긋하던 사내 메신저 알림음은 사라졌고, 카카오톡은 하루 종일 묵언 수행을 합니다. 가끔 울리는 알림이라곤 카드 결제 내역이나 배달 앱 푸시뿐이죠. 무릎이 늘어난 곰돌이 수면 바지를 입고 빈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끔은 그 지독했던 사내 메신저 팝업이 그리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습니다. 가끔 협업하던 외주처 담당자에게서 온 카톡이었습니다.


"작가님, 혹시 지금 바쁘신가요?"


순간,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13년 동안 저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저주받은 다섯 글자. 직장인 시절 같았으면 미간부터 찌푸리며 방어막을 쳤을 그 질문이, 프리랜서의 모니터에 뜨는 순간 기적 같은 생명수로 둔갑합니다.


제 뇌는 방어막은커녕 축포를 쏘아 올립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손가락은 이미 빛의 속도로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완전 한가합니다! 어떤 일이든 당장 투입 가능합니다!"


체면이나 밀당 따위는 곰돌이 수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지 오래입니다. 심지어 느낌표를 세 개씩이나 찍어가며, 제가 얼마나 잉여로운 인간인지, 이 일을 맡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지를 온몸으로 어필합니다.


외교적인 모범 답안요? 프리랜서에게 그딴 건 없습니다. "혹시 바쁘신가요?"라는 질문은 곧 "통장에 입금 좀 해드릴까요?"라는 자본주의적 동의어라는 걸, 제 생존 본능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문자를 보내놓고 스스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습니다. 상사의 지시가 싫어서 회사를 뛰쳐나온 주제에, 이제는 클라이언트에게 제발 일 달라고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얄팍한 태도 변화가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회사에서의 "바빠요?"는 내 이름도 남지 않는 남의 프로젝트를 위한 억지 희생이었지만, 지금의 "바쁘신가요?"는 오롯이 내 통장에 꽂히는 밥값이자, 내 이름 석 자를 건 생존의 증거니까요.


오늘도 저는 모니터 앞에 앉아 스마트폰을 힐끗거립니다. 세상의 모든 클라이언트님들, 제발 저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저는 하나도 바쁘지 않습니다. 언제든 자본주의적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된, 훌륭하고 헐렁한 방구석 대기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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