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참아도 쿠폰은 못 참아

선택적이고 지질한 초연함에 대하여

by COSMO

인연에도 유통기한이 있나 봐요. 예전엔 누군가와 멀어지는 게 겁이 났는데, 이제는 그냥 물 흐르듯 흘러가게 둡니다.


억지로 옷깃을 부여잡는다고 해서 떠날 사람이 남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쥐고 있던 손을 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는 언젠가 더 소중한 인연이 스며들어 채우리라 믿습니다.


어떠신가요. 제법 산전수전 다 겪고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성숙한 어른의 독백 같지 않습니까?


사표를 던지고 회사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체감하는 건 인간관계의 다이어트입니다. 매일 아침 커피 믹스를 타며 날씨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 퇴근 후 삼겹살에 소주잔을 부딪치며 상사 뒷담화를 하던 입사 동기들. 평생 함께할 것 같던 끈끈한 전우애도, 소속이 달라지고 거리가 멀어지니 거짓말처럼 희미해지더라고요.


처음에는 그 서서히 멀어지는 감각이 못내 서운하고 불안했습니다. 나만 세상에서 잊히는 건 아닐까, 명절에 안부 톡 하나 안 오는 스마트폰을 보며 씁쓸함을 씹어 삼켰죠.


하지만 방구석 유배 생활이 몇 달 지나니 나름의 방어 기제가 생겼습니다. 앞서 적은 저 고상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스스로를 포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 얕은 인맥에 연연하지 말자. 나는 이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거야. 스쳐 가는 인연들에 쿨하게 초연해진, 아주 멋지고 성숙한 프리랜서 작가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초연함이라는 녀석은 선택적이고 간사합니다.


어느 주말 저녁, 습관처럼 SNS를 내리다가 전 직장 동기들의 단체 캠핑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나만 쏙 빠진 채 활짝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 지글거리는 바비큐 화로, 그리고 우리 우정 영원히 같은 낯간지러운 해시태그까지.


분명 인연은 물 흐르듯 두는 거라며 폼을 잡았는데, 그 사진을 본 순간 명치끝이 묘하게 시큰거립니다. 아니, 캠핑 간다고 한번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내가 거절하더라도 예의상 찔러는 봐야지. 비워진 자리에 더 소중한 사람이 들어온다더니, 제 카톡 창에는 새로 가입한 쇼핑몰의 광고 메시지와 배달 앱의 푸시 알림만이 외롭게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쿨한 어른은 온데간데없고, 배를 긁적이며 서운함에 몸부림치는 찌질이만 남았죠.


하지만 제 지질함의 진짜 바닥은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인간관계의 유통기한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이고 명확한 또 다른 유통기한 앞에서 터져 나왔으니까요.


그때였습니다. 서운한 마음이나 달랠 겸 치킨을 시키려고 배달 앱을 켰는데—결제 창으로 넘어가 익숙하게 쿠폰함을 눌렀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3,000원 할인 쿠폰이 없는 겁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만료된 쿠폰함을 뒤져보니, 선명하게 찍힌 회색 글씨가 저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유통기한 만료.


현재 시각은 밤 12시 5분. 고작 5분 전에, 자정을 기점으로 쿠폰의 생명이 다해버린 겁니다. 그 순간 저는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절규했습니다. 5분만 빨리 앱을 켰더라면! 아니, 캠핑 사진 보면서 궁상떨 시간만 아꼈어도 배달비는 거뜬히 뺄 수 있었는데!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10년을 동고동락한 동기들이 멀어지는 건 인연의 유통기한이라며 철학자처럼 흘려보냈으면서, 고작 3,000원짜리 치킨 쿠폰의 유통기한 앞에서는 이토록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다니요.


얕은 인맥의 상실은 참아도, 당장의 배달비 3,000원 손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생계형 프리랜서의 날것 그대로의 본성입니다.


그날 밤, 저는 3,000원을 생으로 결제하며 뼈아픈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연은 떠나도 당장 내 배를 곯게 하진 않지만, 할인 쿠폰은 내 영혼과 지갑을 즉각적으로 구원한다는 사실을요. 세상의 잣대에서 멀어져 자유를 얻었다고 착각했지만, 저는 여전히 몇천 원의 이득 앞에서 일희일비하는 얄팍하고 속물적인 방구석 노산군이었던 겁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쿨한 어른이 되기엔 제 통장 잔고가 너무 현실적입니다. 지나간 인연은 놓아주더라도, 다음 달 새로 발급될 쿠폰만큼은 두 눈 부릅뜨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닭다리를 뜯으며 굳게 다짐해 봅니다.


오늘도 방구석 유배자의 밤은 이렇게 선택적이고 지질하게 저물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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