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얼마 전, 예전에 썼던 글을 우연히 들춰봤습니다. 박민영 작가의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라는 문장에 꽂혀서 한껏 고상하게 끄적인 감상문이었죠.
글을 쓰는 것은 내 영혼의 소리를 종이 위에 남기는 것이며, 이는 호모 사피엔스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동굴 벽화에서 선조들의 영혼을 느끼듯, 인간에게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본능이다.
맙소사.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소멸할 지경이었습니다. 직장인 시절, 엑셀 파일과 씨름하다 주말에 카페에서 쓴 글임이 분명합니다.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와 배가 부르니, 영혼이니 호모 사피엔스니 하는 거창한 철학이 줄줄 흘러나왔던 거겠죠.
하지만 퇴사 후 야생의 방구석 프리랜서가 된 지금, 저 글을 다시 읽으니 세상물정 모르는 배부른 소리입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제 자신은 고결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가 아니라, 마감에 쫓겨 헐떡거리며 얄팍한 밑천을 박박 긁어모으는 지극히 세속적인 찌질이더라고요. 영혼의 소리는커녕, 제 글에서는 통장 잔고의 비명만 가득합니다.
과거의 저는 또 이렇게 적어두었더군요. 책 읽기는 그 목적을 글쓰기로 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요.
이 문장만큼은 지금도 격하게 공감합니다. 시간이 남아서, 혹은 교양을 쌓으려고 읽는 책은 금방 휘발됩니다. 하지만 내일 당장 마감해야 할 에세이의 글감을 찾겠다는 절박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펼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눈에 불을 켜고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활자를 훑습니다. 남의 책을 읽으며 그 저자의 위대한 정신세계를 거니는 게 아니라, "오, 이 문장 찰진데? 내일 글 도입부에 슬쩍 비틀어서 써먹어야지!" 하며 실용적이고 얄팍한 도둑질을 계획하죠.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마감이 이끄는 처절한 독서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더군요. 지식은 복리로 쌓인다는 아주 멋진 통찰을 말이죠.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부족함을 깨닫고 다시 책을 찾게 되는 선순환을요.
방구석 작가 생활을 해보니 이 복리의 마법은 지식뿐만 아니라 불안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책을 읽어 배경지식을 넓히고 호기롭게 타자를 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쓰다 보면 제 얕은 지식의 바닥이 너무 빨리 드러납니다. 아, 나 진짜 아는 게 없구나. 처절한 자각과 함께 다시 책장으로 도망갑니다.
그렇게 다른 책을 읽고 또 쓰기를 반복하다 보면,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진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방구석에서 몸소 실천하게 됩니다. 지식의 선순환인지 무지의 무한궤도인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타자는 치고 있으니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쐐기도 박았습니다. 깊이 있는 독서, 즉 메모하고 정리하는 게 곧 작가 수업이라고요. 일거양득의 전범이자 모범이라고 극찬을 하면서요.
지금 제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책들을 보면 작가 수업의 현장이 노골적입니다. 예쁘고 정갈한 독서 노트 따위는 없습니다. 책장 귀퉁이는 죄다 접혀 있고, 여백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3화 소재로 쓸 것!", "아, 이거 진짜 내 얘기네 ㅠㅠ" 같은 생계형 메모들만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게 진짜 살아있는 작가 수업입니다. 어디 비싼 돈 주고 문예 창작 아카데미에 등록해야만 작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남의 글에 감탄하고, 내 부족함에 좌절하고,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책 귀퉁이에 메모를 남겨 내일의 밥벌이로 승화시키는 이 치열하고도 지질한 과정 전체가 저만의 작가 수업입니다.
동굴에 벽화를 남기던 호모 사피엔스 선조들도 아마 저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위대한 유산을 남기겠다는 거창한 목적보다는, "오늘 매머드 잡다가 죽을 뻔함. 진짜 힘들었음"이라는 솔직하고 인간적인 푸념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과거의 제가 썼던 글은 재미 1도 없는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았지만, 덕분에 오늘 치 에세이 한 편을 이렇게 뚝딱 뽑아냈으니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쓸모를 다했습니다.
자, 책 읽기가 글쓰기로 완성된다는 옛말을 방금 증명했으니, 이제 내일 쓸 글을 위해 또 다른 책을 털러 가봐야겠습니다. 위대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는 오늘도 방구석에서 야무지게 남의 책에 밑줄을 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