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봄동 비빔밥

마감은 밀려도 제철 음식은 참을 수 없지

by COSMO

프리랜서의 하루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자가 누구냐고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바로 알고리즘입니다.


출근할 회사도, 결재를 올릴 부장님도 없는 이 텅 빈 방구석에서 저를 조종하는 건 스마트폰 화면 속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거든요. 제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살지까지 빅데이터의 촘촘한 그물이 결정합니다. 남의 시계에 맞춰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내 발로 회사를 뛰쳐나왔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는 실리콘밸리 천재들이 짜놓은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스마트폰 화면은 온통 달고 끈적한 갈색빛이었습니다. 이른바 두쫀쿠, 두바이 초콜릿 쫀득 쿠키의 시대였죠.


새벽 두 시. 마감 요정에게 멱살을 잡혀가며 억지로 모니터 앞에 앉아있을 때, 무심코 켠 숏폼에서 바삭하고 쫀득한 두쫀쿠를 반으로 가르는 영상이 튀어나오면, 그날 글쓰기는 망한 겁니다. 꾸덕하게 늘어나는 피스타치오 스프레드에 혈당이 요동치고, 결국 편의점으로 달려가 이름 모를 초코 과자라도 입에 쑤셔 넣어야 직성이 풀렸으니까요.


그렇게 제 뱃살을 늘려주던 달콤한 폭군이 물러가더니, 어느새 알고리즘은 화면을 풋풋한 초록빛으로 도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풀리기 무섭게 쏟아지는 봄동 비빔밥 영상들. 아삭한 봄동을 썰어 넣고, 참기름을 휘리릭 두르고, 반숙 계란을 얹어 쓱쓱 비벼 먹는 장면들.


ASMR 마이크를 타고 넘어오는 청량한 씹는 소리에 홀리다 보면, 어느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입니다.


문제는 이 영상을 본 타이밍이었습니다.


오늘도 빈 모니터를 째려보며 깜빡이는 커서와 기싸움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한 시간째 첫 문장을 못 써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죠. 그러다 또다시 봄동 비빔밥 영상을 마주친 순간, 제 안에서 기막힌 합리화 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글이 안 써지는 건 다 이유가 있어. 봄이 왔는데 칙칙한 방구석에서 어제 먹다 남은 배달 떡볶이나 데워 먹고 있으니 영감의 샘이 꽉 막혀버린 거지. 모름지기 작가란 제철의 생명력을 흡수해야 활기찬 문장을 쓸 수 있는 법이야.


결코 마감을 피해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작품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자연의 영양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저는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늘어난 수면 바지를 벗어던지고, 대충 모자를 눌러쓴 채 동네 마트로 향했습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채소 코너에서 봄동 한 단을 신중한 눈빛으로 고릅니다. 마치 대작을 집필하기 전 취재를 나선 소설가처럼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흙을 털어내고, 차가운 물에 잎사귀를 씻어 물기를 탁탁 뺍니다. 고추장에 매실액을 약간 넣고 참기름을 듬뿍 뿌려 유튜브에서 배운 특제 양념장도 만들었죠. 계란은 영상에서 본 대로 노른자가 영롱하게 살아있는 반숙으로 구워냈습니다.


커다란 양푼에 갓 지은 밥을 담고 그 위에 파릇한 봄동과 계란, 양념장을 올리니 제법 그럴싸한 비주얼이 탄생했습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부지런하고 건강한 삶을 사는 일류 크리에이터가 된 것 같은 묘한 뽕에 취했습니다. 양푼을 끌어안고 넷플릭스를 틀어놓은 채 봄동 비빔밥을 푹푹 퍼먹습니다. 아삭아삭 씹히는 봄동과 고소하게 코팅되는 노른자의 조화라니.


알고리즘의 간택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두쫀쿠의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주는 건강하고 산뜻한 맛에 위장도 마음도 완벽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까지 끝낸 뒤 다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봄동의 푸릇푸릇한 생명력을 듬뿍 흡수했으니 이제 폭포수처럼 글이 쏟아져 내릴 차례죠.


그런데 맙소사. 모니터 속 커서는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저를 비웃듯 깜빡거리고 있습니다.


대신 탄수화물을 잔뜩 때려 넣은 위장이 격렬한 소화 활동을 시작하며 뇌로 가는 혈류를 몽땅 빼앗아 갑니다. 나른한 춘곤증이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건 문장이 아니라 졸음이었습니다.


제철 음식의 생명력은 문장력이 아니라 제 위장의 소화력으로만 오롯이 흡수된 게 분명합니다.


결국 저는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침대로 슬금슬금 기어들어가며 생각합니다. 남의 시계에 맞추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회사를 뛰쳐나와 놓고, 정작 내 점심 메뉴 하나도 유튜브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는 이 얄팍한 주체성이라니.


뭐 어쩌겠습니까. 갓생은 실패했고 마감은 조금 더 미뤄졌지만, 적어도 오늘 한 끼만큼은 세상의 트렌드에 완벽하게 발을 맞췄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달콤한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때는 정말로 글이 술술 써질 지도 모릅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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