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흥도는 배달 라이더

자발적 유배자의 고독과 떡볶이

by COSMO

요즘 극장가에서 천만 관객을 넘기며 난리 난 영화가 있죠. 바로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입니다. 저도 얼마 전 조조할인을 받아 영화관 구석 자리에 앉아 훌쩍거리며 보고 왔습니다.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밀려나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난 어린 단종, 그리고 그를 지키는 촌장 엄흥도의 이야기는 시리고 따뜻했습니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이고 뒤로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는 청령포의 풍경은, 그 자체로 완벽한 감옥이더군요.


그런데 영화의 여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텅 빈 방구석에 덩그러니 앉아있자니, 묘한 기시감이 뒤통수를 세게 치고 지나갔습니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가로막힌 이 좁은 공간. 하루 종일 사람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서늘한 적막함. 가만 보니 여기도 영락없는 유배지가 따로 없더라고요. 시장통 같던 사무실을 떠나 이 고요한 방구석에 출근한 지 몇 달째입니다. 창밖으로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면, 마치 강 건너 딴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마저 듭니다.


제 방 문지방을 넘는 순간, 저는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방구석 청령포의 유배객이 되었습니다.


물론 영화 속 단종과 저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16세의 노산군 단종은 숙부인 세조의 서슬 퍼런 칼날에 밀려 억울하게 강제 유배를 당했지만, 13년 차 엑스 엔지니어인 저는 내 발로 멀쩡한 회사를 박차고 나와 이 방구석으로 자발적 유배를 왔다는 점이죠.


누구도 제 목에 칼을 들이밀며 당장 방구석으로 꺼져서 글만 쓰라고 협박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프리랜서라는 달콤한 자유에 취해 제 손으로 사약을, 아니 사직서를 달게 마셨을 뿐입니다. 매달 통장에 꽂히던 따박따박한 월급이라는 호사를 스스로 걷어차고, 기꺼이 이 배고프고 외로운 길을 택한 셈입니다.


영화 속 단종은 유배지에서도 산속 호랑이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며 왕족의 꼿꼿한 기개를 잃지 않습니다. 멋진 호연지기죠.


그렇다면 자발적 유배를 택한 방구석 노산군의 기개는 어떨까요.


호랑이는커녕 유튜브 알고리즘의 유혹에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무서운 자객 대신 마감 요정의 눈치를 보며, 며칠째 빨지 않은 늘어난 수면 바지를 입고 키보드 위에서 타닥타닥 나약한 마우스 클릭질만 쏘아댑니다.


글이 안 써지면 언제든 뒤통수에 닿을 거리에 있는 침대로 도망칠 궁리나 하는, 기개는커녕 배달 앱 VIP 등급만 남은 헐렁한 몰골입니다.


게다가 영화 속 단종 곁에는 목숨을 걸고 끼니를 챙겨주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퍼붓는 엄흥도라도 있었습니다. 차가운 유배지에서 그 온기 하나에 의지해 버티는 모습이 얼마나 뭉클하던지요.


하지만 이 고독한 프리랜서의 섬에 밥을 가져다주는 분은 오직 배달 앱의 라이더님뿐입니다. 엄흥도는 눈보라를 뚫고 밥을 지어 왔지만, 저의 엄흥도 님은 GPS를 뚫고 로켓 배달을 오십니다. 그분들은 제 안위 따윈 묻지 않고, 문 앞에 마라탕과 떡볶이를 조용히 내려놓은 뒤 사진 한 장을 남기고 한 줄기 바람처럼 쿨하게 사라지십니다.


애틋한 교감은 없고 "문 앞 배달 완료되었습니다"라는 건조한 알림음만 방 안을 채웁니다. 그래도 배는 채워지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가끔은 이 완벽한 고립 속에서 단종 못잖은 고독과 절망을 씹어 삼킵니다. SNS를 열면 번듯하게 승진하는 동기들의 소식, 화려한 사원증을 목에 걸고 판교의 세련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는 사진들이 쏟아집니다. 나만 이 방구석이라는 외딴섬에 갇혀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영영 잊히는 건 아닐까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어쩌면 유배지에서 한양의 소식을 기다리던 단종의 타는 목마름이 이런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련의 주인공 행세를 하기엔, 저는 이미 제 의지로 이 섬에 닻을 내린 사람입니다. 억울하면 숙부 탓이라도 하겠지만, 저는 오롯이 제 탓입니다. 남의 시계에 맞춰 사는 게 숨이 막혀서, 내 시계대로 살아보겠다고 선택한 셀프 유배입니다.


누군가 억지로 가둔 것이 아니니, 이 외롭고 지질한 유배 생활도 결국은 제가 온전히 책임질 저만의 영토입니다.


그러니 자기 연민에 빠져 청승을 떠는 짓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합니다. 역사 속 단종은 복권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지만, 저는 오늘 치 원고만 마감하면 바로 배달 떡볶이와 넷플릭스로 스스로를 성대하게 복권시켜 줄 수 있거든요.


자, 식어빠진 배달 음식 앞에서도 펜을 들어야 하는 방구석 유배자 동지들. 오늘도 우리만의 좁고 초라한 영토에서 꿋꿋하게 타자를 쳐봅시다.


호랑이는 못 잡아도, 마감은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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