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야 하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며칠 전 완간 소회를 올리며 호기롭게 선언했습니다. 당분간 알람도 끄고 완벽한 백수로 돌아가겠다고요. 밀린 영화도 보고, 늦잠도 자고, 뇌를 텅 비운 채 뒹굴거리겠다고 수많은 독자님들 앞에서 큰소리쳤습니다. 댓글로는 "작가님 푹 쉬세요!", "충전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는 따뜻한 덕담들이 줄을 이었죠.
그런데 사람의 관성이라는 게 참 무섭고도 징그럽습니다.
알람을 모두 끄고 잤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아침 정확히 평소 글을 쓰러 일어나던 시간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 나 오늘부터 백수지' 하고 다시 눈을 감아보려 했지만, 이미 뇌는 풀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제 안의 마감 요정이 출근부 도장을 안 찍냐며 뺨을 한 대 때리고 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억지로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 거실로 나와 넷플릭스를 켰습니다. 그래, 남들 다 출근해서 상사한테 깨지고 있을 이 아침 시간에, 나는 소파에 누워 미드를 보는 거다. 이것이 바로 프리랜서의 특권이지. 스스로 세뇌하며 화면에 집중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속 주인공이 툭 던진 대사 한마디에 갑자기 신경증이 도집니다.
어? 저 말 진짜 공감되네. 저걸 주제로 글을 하나 쓰면 재밌겠는데?
그 순간 제 손은 이미 스마트폰 메모장 앱을 열었습니다. 방금 들은 대사를 적어놓고, 거기에 어울릴 만한 도입부를 끄적이고, 제목은 뭘로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쉬겠다고 틀어놓은 넷플릭스는 어느새 훌륭한 백색소음이자 아이디어 발전소로 전락해 버렸죠.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직장인 시절에는 주말만 되면 세상이 무너져도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숨만 쉬었는데 말입니다. 금요일 퇴근 시간부터 일요일 밤까지는 회사 메신저 알림이 울려도 흐린 눈으로 무시하는 스킬을 장착했었죠. 하지만 소속도 없고 정해진 휴가도 없는 전업 작가가 되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쉬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출퇴근의 경계가 없다는 건 매일이 휴일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매일이 평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타자를 치지 않으면 내 세상은 멈춰버린다는 얄팍한 불안감, 타임라인에 누군가의 신간 출간 소식이 뜰 때마다 나만 이 소파에 파묻혀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잡습니다. 휴식조차 하나의 업무처럼 "자, 지금부터 완벽하게 쉬어야 해!"라고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으니, 몸은 누워 있어도 머릿속 공장은 야근 중입니다. 프리랜서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란 축복이 아니라 일종의 직무 유기입니다. 지독한 병이죠.
결국 저는 넷플릭스 탭을 조용히 닫고, 책상 의자를 빼고 앉아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빈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는데, 맙소사. 묘하게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쯤 되면 활자 중독을 넘어선 활자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옥죄던 글쓰기라는 인질범에게 푹 빠져버린 거죠. 완벽하게 뒹굴거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단 이틀 만에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낫지도 않을 불치병이라면, 그냥 기분 좋게 앓는 수밖에요. 덕분에 푹 쉬라는 독자님들과의 약속은 가볍게 어겨버렸지만, 이렇게 또 새로운 글로 생존 신고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꽤 괜찮은 반칙 아닙니까.
우리, 그냥 생긴 대로 살자고요. 쉴 때조차 펜을 굴려야 직성이 풀리는 이 피곤한 팔자를 어쩌겠습니까. 오늘도 전국 각지의 방구석에서 '쉬어야 하는데'라는 죄책감과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불안감 사이에서 모니터를 째려보고 있을 프리랜서 동지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기존에 다른 매거진으로 발행된 에피소드입니다. <오늘도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연재 결정을 하면서 통합되었습니다. 이미 답글을 남겨주신 분들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