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까먹는 중고 스팸 세트

소속감은 잃었지만 가성비는 챙겼다

by COSMO

어느덧 찬 바람이 물러가고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오늘도 마감을 피해 냉장고 문만 헛되이 여닫다가, 우연히 찬장 구석에서 노란색 뚜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지난 설 명절 직후에 쟁여두었던, 이제 딱 하나 남은 스팸 통조림입니다.


유통기한은 넉넉하지만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집니다. 이 스팸으로 말하자면, 회사가 하사한 복지품이 아니거든요. 지난 명절, 동네 사거리에서 어느 직장인 분과 직거래를 통해 은밀하게 교환해 온 내돈내산 중고 스팸입니다.


직장인 시절, 명절 연휴를 하루 앞둔 퇴근길은 늘 고역이었습니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하라는 부장님의 알량한 배려가 무색하게, 지하철은 이미 귀성객과 직장인들로 아수라장이었죠. 그리고 제 양손에는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쥐여준 무거운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습니다. 손가락 관절을 파고드는 그 빳빳한 종이 손잡이의 고통이란.


내용물은 안 봐도 뻔했습니다. 식용유와 캔 햄이 빈틈없이 꽉 들어찬 종합 선물 세트, 아니면 평생을 감아도 다 못 쓸 것 같은 거대한 샴푸와 치약 세트. 세심한 정성 따위는 1그램도 없는, 철저히 예산에 맞춰 기계적으로 발주된 복지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지옥철 손잡이에 매달려 이 무거운 애물단지를 들고 있노라면, 감사함보다는 짜증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차라리 이 돈을 현금으로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냥 이 무거운 걸 집으로 배송해 주면 안 되는 건가. 속으로 수백 번 툴툴거렸죠.


결국 집에 도착하자마자 포장지만 벅벅 뜯어 찬장 구석에 처박는 게 명절 선물의 유일한 쓸모였습니다. 단 한 번도 그 뻔한 선물 세트 앞에서 감흥이나 뭉클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표를 던지고 프리랜서 전업 작가가 되어 맞이한 지난 명절, 저의 연휴 전날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손가락이 끊어질 듯 무거운 종이가방도, 만원 지하철도 사라졌습니다. 애초에 출퇴근이라는 개념이 증발해 버렸으니, 남들이 귀성길 정체에 시달릴 때 저는 방구석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고르고 있었죠. 양손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명절 스트레스도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시작은 스마트폰이었습니다. 전 직장 동기들 톡방에 사진이 하나둘 올라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스팸 지옥이네, 우리 회사는 참치 세트로 원가 절감함 같은 툴툴거림이 섞인 메시지들. SNS를 열어도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이 커다란 명절 선물 상자를 들고 찍은 인증샷이 넘쳐났습니다.


분명 그들도 예전의 저처럼 그 무거운 선물을 귀찮아하고 불평할 겁니다. 그런데 그 뻔하고 지루한 투정이, 방구석에 홀로 앉은 저에게는 지독하게 부러운 기만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참치 세트를 쥐여주지 않는 명절.


생각해 보니, 그 지긋지긋했던 명절 선물 세트는 단순한 식료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안에 단단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물리적인 증거였죠. 매달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나오고, 명절이면 잊지 않고 내 몫의 햄 통조림이 할당되는 그 든든한 소속감.


양손에 들려있던 건 단순한 햄과 식용유가 아니라, 당신은 여전히 우리 시스템 안에서 안전합니다라는 일종의 사회적 보증서였던 겁니다.


이제 그 보증서는 사라졌습니다. 회사라는 튼튼한 울타리를 걷어차고 나온 야생의 프리랜서에게, 밥그릇은 온전히 제 손으로 챙겨야 하는 냉혹한 현실만 남았죠.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남들은 다들 저렇게 정상적인 궤도를 돌며 명절을 맞이하는데, 나만 이 텅 빈 방구석에서 궤도를 이탈해 우주 미아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캔 햄 하나 못 받았다는 사실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자유 뒤에 숨어있던 프리랜서의 묵직한 고독이 해일처럼 밀려왔으니까요.


하지만 우울감에 빠져 청승을 떠는 것도 잠시, 저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중고 거래 앱을 켰습니다.


명절 연휴를 전후한 이맘때의 중고 거래 앱은 그야말로 노다지입니다. 전국의 직장인들이 처치 곤란 명절 선물을 헐값에 쏟아내는 시즌이거든요. 검색창에 '스팸 세트 미개봉'을 치자마자 수십 개의 매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정가의 반도 안 되는 가격. 저는 매의 눈으로 가장 가성비가 좋은 게시물을 찾아내 지금 당장 가지러 가겠다고 채팅을 보냈습니다.


소속감은 잃었지만, 덕분에 최저가 가성비는 챙겼습니다. 남들이 회사에서 받아오는 명절 선물을, 저는 동네 사거리에서 직거래로 씩씩하게 받아왔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짐 덩어리인 애물단지가 방구석 유배자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식량이 되는 기적의 경제학이죠.


다시 오늘로 돌아와, 찬장에서 꺼낸 그 마지막 남은 스팸을 두툼하게 썰어 프라이팬에 굽습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짭조름한 기름 냄새가 방 안을 채우자, 지난 명절의 서늘했던 소외감도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래요, 소속감이 밥 먹여줍니까. 갓 구운 스팸 한 조각이 밥을 먹여주죠. 얄팍한 소속감은 잃었지만, 내 밥그릇은 내가 직접 구워 먹는다는 이 주체적인 짠맛이 제법 나쁘지 않습니다.


오늘도 짭짤한 나트륨의 힘을 빌려, 저는 꿋꿋하게 빈 모니터 앞에 앉아 타자를 칩니다. 프리랜서의 봄날은 이렇게 또 굴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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