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적인 전투복에 대하여
퇴사 직후, 저는 자기 계발서에 나올 법한 다짐을 하나 했습니다. 집에서 일하더라도 출근할 때처럼 씻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자. 흐트러진 복장은 흐트러진 정신을 만든다.
13년간 엔지니어로 구르며 뼛속까지 박힌 나름의 직업의식이었죠. 프리랜서 1일 차 아침, 저는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샤워를 하고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와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CEO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청바지의 빳빳한 허리띠는 방구석에서 장시간 타자를 쳐야 하는 프리랜서에게 중세 고문 기구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소화불량과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저는 일주일 만에 청바지를 벗어던지고 헐렁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러다 계절이 바뀌면서 궁극의 작업복을 만났습니다. 바로 극세사 수면 바지입니다.
제 수면 바지로 말하자면,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빛바랜 곰돌이 패턴이 박혀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양쪽 무릎이 발사 직전이라, 바지를 벗어두어도 무릎 부분만 텐트처럼 볼록하게 솟아있는 기적의 핏을 자랑하죠.
그런데 이 흉측한 바지가 주는 편안함은 마약 같습니다. 곰돌이 수면 바지에 늘어난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 어떤 마감도 견딜 것 같은 전투력이 솟습니다. 그렇게 수면 바지는 저의 제2의 피부이자 전투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구석에 비상벨이 울렸습니다.
클라이언트와 갑작스러운 화상 회의가 잡혔습니다. 회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분. 샤워는커녕 세수할 시간도 빠듯했습니다. 저는 빛의 속도로 머리에 물을 묻혀 까치집을 가라앉히고, 옷장을 열어 가장 멀끔한 하늘색 셔츠를 꺼내 입었습니다.
물론 하의는 여전히 곰돌이 수면 바지였습니다.
카메라 앵글을 가슴팍 위로 세팅하고 회의에 접속했습니다. 모니터 속의 저는 신뢰감 넘치는 프로페셔널이었습니다. 클라이언트 역시 저의 단정한(?) 모습에 만족한 듯,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현관문에서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습니다. "택배 왔습니다!"
하필 착불 택배였습니다. 당장 결제해야 합니다. 저는 모니터 속 클라이언트에게 "잠시만요"라고 점잖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서면, 웹캠의 넓은 화각에 곰돌이 수면 바지가 생중계될 게 분명했습니다. 상의는 번듯한 하늘색 셔츠를 입고 하의는 극세사 수면 바지를 입은 이 켄타우로스 같은 몰골을 들킬 수는 없었죠.
순간 엔지니어의 두뇌가 공간의 각도와 화각을 계산했습니다.
저는 의자에서 일어나는 대신, 엉덩이를 바닥으로 스르륵 미끄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카메라 앵글의 사각지대인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네 발로 바닥을 기어 방문 밖으로 향했습니다. 특수부대원처럼 상체를 낮추고 무릎으로 거실을 가로지르는 포복 전진이었죠.
현관문을 열고 헉헉거리며 나타난 저를 본 택배 기사님의 눈빛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결제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기어들어 와, 아무 일 없다는 듯 의자에 앉아 셔츠 깃을 가다듬고 회의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모니터를 끄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완벽하게 우아한 백조는 없다고 하죠. 수면 위로는 평온해 보여도 물밑에서는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는 법이니까요. 지금 제 꼴이 딱 그렇습니다. 모니터 위로는 세상 번듯한 프로페셔널의 탈을 쓰고 있지만, 책상 밑으로는 곰돌이 수면 바지를 입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처절한 생계형 프리랜서.
이 기형적인 복장이야말로, 세상의 잣대와 나의 게으름 사이에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 살아남으려는 방구석 유배자의 가장 솔직한 자화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적 체면은 상의에 양보했으니, 저의 헐렁한 본성은 하의에 남겨두기로 합니다. 자, 오늘도 곰돌이 수면 바지의 튀어나온 무릎을 쓰다듬으며 꿋꿋하게 타자를 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