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레이먼드 챈들러 | 책 리뷰
흰쌀밥에 담백한 뭇국과 정갈한 반찬의 한 끼 식사도 좋지만, 육즙이 넘치는 기름진 패티와 먹음직스러운 치즈가 흘러넘치는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빅 슬립』은 그런 느낌의 소설이다. 필립 말로(Philip Marlowe)라는 독보적인 캐릭터의 탄생도 이 소설과 함께였다. 이 소설에서 완성된 탐정 필립 말로의 모습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을 상징하는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이 책은 챈들러가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자,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대표작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말 그대로 질 낮은 종이로 만든 펄프 매거진이 유행했다. 이러한 소설은 사회 문제를 깊이 있게 그리거나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로 대중이 흥밋거리로 가볍게 읽을 만한 소설이 실렸는데, 여기 실린 소설들을 보통 펄프픽션이라 불렀다. 자연스럽게 펄프픽션은 싸구려 소설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런 만큼 펄프 매거진은 문턱이 낮아,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를 잡기 어려운 무명작가들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챈들러는 이십 대 중반 미국으로 돌아와 로스앤젤레스에 자리 잡아 회사원이 되었으나, 1932년 음주벽을 이유로 십 년을 일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대공황 시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선택한 길은 한때 꿈으로 삼았던 작가가 되는 일이었고, 자연히 그는 무명작가도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펄프 매거진에 글을 싣게 되었다.
레이먼드 손턴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
1888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다. 십 대 초반 영국으로 이주해 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907년 해군성에 들어갔으나 반년 만에 그만두고 나와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발표했다. 1912년 미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돌아와 석유 회사에 정착했으나, 1932년 음주벽을 이유로 십 년 동안 일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1933년 펄프 잡지에 『협박범은 쏘지 않는다』를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54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5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문학에서 ‘하드보일드’는 보통 폭력적이거나 위험한 사건을 냉정하고 건조하게 다루는 글을 가리킨다. 이러한 특성상 추리소설에서 크게 발전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미국 범죄소설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1940년대 이후 필름 누아르가 발전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형태와 방식을 다듬어 완성한 대가라 평가받는다.
스턴우드 장군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사설탐정 필립 말로가 작은딸과 얽힌 협박장을 처리해달라는 장군의 의뢰를 받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뢰를 조사하던 중 협박범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이 살인 사건은 얼마 전 애인과 도망쳐버렸다는 장군의 큰사위와 즉 큰 딸의 남편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로는 이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곧 소문과 달리 장군의 사위가 사라진 일에는 다른 비밀이 얽혀 있음을 눈치챈다. 이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말로는 다시 스턴우드 장군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저 이 추리소설의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는 것은 매우 비효과적인 ‘독서’가 돼버린다. 『빅 슬립』을 제대로 읽으려면 긴 플롯의 서사보다는 현재 읽고 있는 문장에 집중하는 것이 정답이다. 말로의 오감을 자극하는 주변 환경 묘사,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위트 넘치는 대사 그리고 숨 막히는 액션 장면 등 그야말로 순간순간을 음미하며 읽는 것이 『빅 슬립』의 독서법이자 챈들러 스타일이다.
챈들러 스타일이라는 뜻의 챈들레스크(Chandleresque)라는 단어까지 생길 정도로 특징적인 그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장르의 토대가 되었으며,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챈들러를 자신의 영웅이라 부르면서 언제나 그를 향한 애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람 중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가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 챈들러를 향한 하루키의 애정은 대단하다. 하루키는 챈들러를 존경하는 한 명의 팬이자, 일본 최초로 챈들러의 장편소설 전 권을 소개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작가들의 작가란 바로 레이먼드 챈들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재미있는 책이다. 깊이 있는 철학적 고찰이나 의미 있는 인사이트를 원한다면 과감하게 책을 덮기를 권한다. 하지만 첫 페이지를 읽고 나면 다음 페이지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 독자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 저자가 펼치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전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감각적인 표현의 문체 그리고 필립 말로를 비롯한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2021 코스모’s Best Book Award 선정 도서
빅 슬립•레이먼드 챈들러 | 문학동네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