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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Feb 10. 2019

약해지는 것을 보는 건 슬프다

아빠와 당뇨


약해지는 것을 보는 건 슬프다.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종합병원 외래진료의 대부분은 이상 없음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외래에서 환자가 의사를 만나는 시간은 5분 내외이고, 보통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런데 몇 주 전 외래진료에서 아빠는 당뇨 진단을 받았다. 새해부터는 출근해보겠다는 아빠의 다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신장이식 환자 중 3~40%는 당뇨가 발생한다고 한다. 사실은 아예 예상하지 못한 문제도 아닌데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회사에서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울려대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도, 온수매트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을 일만 남은 하루의 마지막 순간에도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실은 괴로워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랬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공복 혈당을 재고 시간 맞춰 당뇨 식단으로 삼시 세 끼를 차리는 사람은 엄마고, 그걸 먹는 건 아빠인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래서 얻은 피곤함을 무기로 괜찮냐는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빠는 자주 기운이 없다고 했다. 식단 조절을 하니 배가 고파 누워만 지내게 된다고 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설 연휴였고 그제야 나는 아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찾아보게 되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라는데 생각해보니 아빠의 신장병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따로 공부한 적도 없다. 처음 아빠가 만성 신부전증을 진단받았을 때, 고3 시절 과외선생님이 해준 말이 그제야 생각난다. 이제부턴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아빠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그 말을 이해하는 내가 정말 나쁜 사람 같다. 연휴가 시작되던 금요일 퇴근길에 서점에서 책을 두 권 샀다. 신장이식에 대한 책 1권과 당뇨 식단 책 1권이었다.


매일 당뇨와의 전쟁을 치르던 엄마 아빠가 시간이 갈수록 지쳐가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행여나 식단 책을 사는 것이 엄마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될까 걱정도 되었다. (참고로 엄마는 백종원을 싫어한다. 백종원이 티비에만 나오면 아빠가 새로운 메뉴를 요구한다는 이유에서..) 일단 카톡으로 의견을 물어보니 엄마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아빠에게 책을 내밀었다. 책을 건네자마자 안경 너머로 보이는 작은 눈이 휘둥그레 해져선 활짝 웃으며 기뻐한다.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며 연신 엄마를 불러댄다.


”여보! 생선은 먹을수록 좋대!”

“여보! 회도 먹을 수 있다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이 시큰해진다. 아빠의 호들갑에 달려온 엄마도 책을 보고 너무나 기뻐한다. 역시 챙겨주는 건 딸밖에 없다고 한다. 이제 아침마다 고민 좀 덜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너무 못났다고 생각한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바쁘단 핑계를 대고 미룬 건가 해서. 미안하다고 더 빨리 샀으면 좋았을걸 하니 노부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날 밤, 신장이식에 대한 책을 열심히 읽었다. 아빠가 신장병을 진단받은 지 딱 10년 만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늦었다는 그 말이 딱 맞다. 이상하게 책장을 넘기는 게 힘들다. 신장이식 환자가 주의해야 할 점, 이식과 면역억제제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많다. 책 속에 마음 아픈 사실이 너무 많다. 이제껏 내가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이 수많은 사실들을 아빠는 혼자 어떻게 견뎌낸 걸까?


얼마 전 조카가 태어났다. 아빠의 요즘 낙은 손녀 사진과 동영상을 보는 것이고, 운전은 싫어하지만 손녀가 있는 인천까지는 흔쾌히 간다. 손녀를 안은 아빠를 찍어주었다. 입에 귀에 걸렸다. 그런데 사진 속의 아빠가 너무 늙은 것 같다. 갓 태어난 조카와는 너무 대비되는 하얗게 센 머리의 이제는 말라버린 우리 아빠. 풍채 좋고 머리도 검던 우리 아빠 모습이 문득 그리워져서 그 사진이 싫어졌다.


며칠 전엔 아빠가 집에서 운동한다고 해서 숀리 바이크를 사주었다. 우리 집에 있던 워킹머신은 소리 소문 없이 수건걸이가 되었고, 단 한 명도 집에서 스트레칭조차 하지 않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또 속는다. 아빠가 약해지는 걸 보는 일은 너무 마음 아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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