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4개 대륙 여행자 생활 후에
물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게 되어 일 년 후 연말정산을 한 지금 24년의 소비는 예년에 비해 꽤나 줄었다. 광고에 현혹되어 이것저것 사던 시절을 지나.. 이제 여행 빨 거의 없어져 물욕이 스물스물 차오르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옷장 가득 차 있는 것들을 보며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구나 하고 깨달은 순간은 오래 떠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몰랐을 느낌일 거다.
사고 싶은 게 생기면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있는지 생각해 본다. 대부분 안 사도 되는 것들이고 순간의 욕망이 끓어오르지만 지나고 나면 잊혀진다. 시각적으로 예쁜 것은 사진을 찍어두고 들여다보기만 해도 즐겁다.
짐이 늘어나는 게 두려워 타협한 나의 절충 방안은 옷 대신 모자, 무거운 기념품은 사진으로 남기고 작은 자석이나 엽서로 만족하는 것.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리는 것. 여행 후반에 낡아가는 옷들은 이곳저곳의 의류함이나 쓰레기통에 두고 왔다. 체크인 캐리어 한 개에 들어가는 옷으로 낮이고 밤이고 돌려 입으면 생각보다 옷이 빨리 낡는다. 같은 옷들을 돌려 입는 대신 모자를 바꿔가며 기분을 내려했다. 사실 모자 여닐곱개는 산 것 같다..^^
전날 밤 또는 당일 아침에 하루의 계획을 정한다. 교통편과 가볼 곳을 정하는 것이 일상의 과업이자 루틴이다.
여행 초반에 미리미리 세웠던 계획들은 어쩐지 나를 후회하게만 만들었다. 시간 제약이 없는 나에게 어떤 날이 되었을 때 이전에 정해둔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그날의 감정을 애써 무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몇 번의 크나큰 아쉬움을 겪고 나서는 정말 최소한으로만 일정을 잡고 움직였다.
그날그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온전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면서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정말 내가 끌리는 대로 원하는 대로만 행동할 수 있는 날이 살면서 며칠이나 되었을까?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글로 적어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문장이 만들어진다. 다 기억할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이렇게 생각했구나 싶다.
팬데믹 동안 책을 꽤 자주 읽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이 문장으로 머리에 떠오를 때가 있었다. 지금 와서는 글을 더 쓰면서 다니지 않은 것이 조금 후회되지만 그래도 간간히 적어놓은 문장들이 지금에 와서 꽤 큰 위로가 된다.
문득문득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에서의 일상 장면.
일 년이 지나니 조금은 희미해졌지만(그래서 슬프고 꼭 글로 남겨둬야지 한다) 잔뜩 흐린 하늘을 보면 우중충했던 에든버러의 공원이 생각나고, 비가 많이 오면 안티구아에서 어학원을 가던 길 갑자기 쏟아지던 소나기에 좁은 처마 밑에서 툭툭 잡던 날이 생각난다. 자주 입던 운동 재킷을 걸치면 이걸 입고 다니던 런던의 요가원과 그곳의 가득 찬 열기(발냄새…)가 떠오른다. 어떤 트리거로 인해 그날의 장면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펼쳐진다. 이것은 마치 내 머릿속에서 넷플릭스를 골라 보는 것 같다.
수많은 날들을 다녔지만 특별한 날은 잘 기억나지 않는 회사 근처. 길지 않은 날이었지만 언제나 선명한 여행지의 골목들. 어쩌면 인간이 정해 둔 시간단위는 정말로 의미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생각에 남지 않는 하루도 그 나름대로 편안한 날이었다고, 하루하루 발 뻗고 잘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최근 송년 모임에서 이야기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