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계획 세우기

6 JUN 2025

by 게으른 곰

도서관에 왔다. 오늘은 우리 집 잔디를 깎는 날이다. 잔디를 깎으러 마크가 우리 집에 온다. 나는 뒷문을 열어놓고 그 시간에 외출을 한다. 마크는 2주에 한 번씩 방문하는데 요즘은 겨울이라 비가 많이 내려 잔디가 쑥쑥 자란다. 여름엔 비실 비실 겨우 고개를 들고 있더니, 요즘 마당을 보면 잔디들이 무척 신나 보인다. 아침에 뒷문을 열어두려고 마당을 지나가는데, 밤새 비가 많이 와 물웅덩이가 많이 생겼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2주 전에 마크가 잘라놓은 잔디 조각들이 발에 달라붙었다. 녀석들, 고새 많이 자랐다. 너희들 오늘 이발하는 날이다.


뒷문을 열어놓고 집으로 들어와 아침을 준비한다. 요즘따라 아침에 정신이 없다. 아이들 도시락은 점점 간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침 식사도 어젯밤에 먹은 반찬이거나 시리얼인데, 아침이 왜 이렇게 어수선한지 모르겠다. 아마 아이들이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 년 학사 일정의 중간에 접어서는 요즘, 아이들은 매주 시험을 보고 과제를 한다. 큰애는 ART 과제를 하느라 책상이 난장판이다. 둘째는 매주 화학 시험을 보고 있는데, 영어 에세이 제출과 생물 시험 일정이 추가됐다. 거기에, 오늘은 둘 다 양궁 활동을 해야 하고, 그 뒤엔 다른 학교 KOREAN NIGHT 축제에 가야 한다. 공부도 하고, 스포츠도 하고, 놀기도 하려면 정신없이 바쁜 게 당연하다. 덩달아 나도 바쁜데, 오늘은 기사노릇을 해야 한다. 모셔다 드리고, 모시고 오는 일정이다. 대중교통이 우리나라만큼 좋지 않아 차로 가면 20분인데 버스로 가면 1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아쉽게 오늘은 혼자 즐기는 ‘와인데이’지만 내일로 미뤄야 한다. 축제는 9시에 끝난다.


벌써 오전 10시다. 글을 빠른 시간 내에 후다닥 쓰고 싶은데 요즘은 500자 정도 쓰는데도 1시간이 더 걸린다. 어느 날은 2시간 동안 글을 쓴다. 매일 거기서 거기인 뻔한 글인데,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이만큼 쓰는데 50분이 걸렸다. 비슷한 매일을 보내면서 매일 글을 쓰는 건 무언가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래도 생각나지 않으면 야속한 시간만 계속 보낸다. 짧은 순간의 주름을 펼치고 펼쳐 긴 글을 쓸 수 있는 재주가 아직 없다. 사물을 깊고 자세히 지켜봐야 하는데, 시간 많은 나는 도대체 하루 종일 뭘 하느라 잠시 멍 때릴 시간도 없는지 모르겠다. 이건 다 유튜브 때문이다. 요즘 유튜브에 대한 자각을 자주 하는 걸 보니, 뭔가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


11시에 Sugar at Chelsea Bay에서 두 명과 약속이 있다. Chelsea Sugar Refinery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버켄헤드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설탕 공장이다. 이 공장은 뉴질랜드의 유일한 설탕 정제소라고 한다. 뉴질랜드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곳이다. 공장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있는데, 나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 아이들과 언제 가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다.

우리 셋은 오늘 처음 만난다. 얼굴도 모르지만 도착하면 신기하게 서로를 알아본다. 몇 주 전에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만나 커피를 마신적이 있었다. 그때도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서로를 알아봤다. 심심하다고 올린 글에 달린 100개가 넘는 댓글 중에서 만나고 싶어 했던 분들에게 천천히 연락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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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gar at Chelsea Bay cafe 전경. 사진은 못찍었지만 공장도 예쁜 분홍색이다.


심심한 사람들끼리 모여 삶이 얼마나 심심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의외로 심심하지 않은 삶을 발견하게 된다. 작은 움직임. 작은 행동. 작은 용기가 내 세상을 뒤집는다. 요즘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성장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고작, 작은 그림 한 장과 짧은 글 한 편을 쓰면 하루의 대부분이 가버리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그림과 글이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알려준다. 그 틈에 영어 수업도 가고, 아트 모임도 가고, 사람과 커피도 마시고 산책도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마트도 가고, 철물점도 간다. 오늘은 아이들 픽업 기사로서의 새 일정도 있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루가 꽉 차고 일주일이 꽉 찬다. 그러다 보면 한 달이 가고 올해도 금세 가버리겠지.


이렇게 별거 안 하면서 바쁜 하루가 조금 우습다. 조금 더 대단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데,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건, 게으름 때문인지, 대단한 일이 뭔지 잘 모르겠어서인지, 내 세상이 좁아서인지 잘 모르겠다. 일 년이 다 갔을 때, 가슴속에 아주 작은 성취들이 모여 꽉 차면 좋겠다. 큰 덩어리가 없어 채우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꾹꾹 눌러 담은 마음 보따리 하나 들고 한국에 가고 싶다. 한국에서 편한 마음으로 마음에 눌러 담은 작은 성취들을 다시 펼쳐보며 내년을 계획해보고 싶다. 내년에는 주먹만 한 덩어리 하나 예쁘게 빚어 담아 한국에 가야지. 글 한편 쓰니, 내년 계획까지 세웠다. 꽤 괜찮은 하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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