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한 새벽

8 JUN 2025

by 게으른 곰

오전 4시, 문득 눈이 떠졌다. 요즘 이렇게 새벽에 가끔 눈이 떠진다.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넘긴다.


이건 글을 매일 쓰면서 생긴 버릇이다. 너무 이른 시간에 눈이 떠진 날은 가만히 눈을 감고 문장을 떠올린다. 지금 느끼는 감정과 이불속 온도, 기분, 어제 있었던 일들을 차례로 천천히 떠올리고 다시 접어 보관한다. 사실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일어나 공책이나 노트북에 기록을 해야 선명하게 기억이 될 거라는 걸 알지만 이불밖을 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을 잇다 보면 잠이 다시 들까 말까 하는 상태가 된다. 이대로 다시 잠이 들면 다행인데, 한참 시간을 보내도 잠이 오지 않으면 결국, 스탠드 불을 킨다. 절반정도 환해진 방 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기장판을 켜고 잔 지 이미 몇 주가 지났는데, 오늘은 유난히 한기가 느껴진다. 취침 모드에서 온도를 1로 올리고 다시 턱밑까지 이불을 잡아당긴다. 휴대폰을 열어 바깥 온도를 확인하니 9도이다. 블라인드로 가려져있어 창문이 보이지는 않지만, 유리에 이슬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면 늘 맞는 아침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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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 아침을 맞는다. 습기가 많이 차는 날은 물이 유리를 타고 밑으로 흘러 내린다. 그래도 비 안 오고 해 뜨는 날은 행복한 날이다.

뉴질랜드 겨울은 습도가 높고 비가 자주 온다. 그래서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벽이나 옷장 안에 곰팡이가 쉽게 생기기 때문이다. 세 번째 뉴질랜드에서 겨울을 맞는 나는 계절에 따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뼈가 시리게 추운 아침이라 하더라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온이지만, 창문을 열고 거실에 앉아있으면 한국의 겨울과 비슷한 추위가 느껴진다. 친구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다. 영상 기온의 겨울이 뭐가 춥냐고 난리다. 영상 6도의 날씨에 바닥 난방이 없는 뉴질랜드 집에 있으면 하얀 입김이 나오고 이가 딱딱거린다. 겨울 동안 나는 집에서 두꺼운 파카를 입고 산다. 24시간 내내 온풍기를 틀 수는 없으니. 그리고 밖보다 집안이 더 춥다. 신기한 일이다.


추운 날씨를 지나 계속해서 생각의 흐름을 좇다가 오늘 큰애가 양궁 대회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일요일이지만 대회를 위해 학교에 7시까지 가야 한다. 학교에 모여 밴을 타고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한다. 6시엔 일어나 아침을 차려주고 잘하고 오라는 응원이 섞인 배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애들이 다니는 학교는 그동안 양궁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프리미어 팀이 근래에 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큰애도 프리미어 팀에 작년부터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데, 학교 전체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적도 있을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스포츠 팀별로 프리미어 멤버들에게만 제공되는 스포츠 재킷을 오늘도 꺼내 입으며 흐뭇해할 큰 애 얼굴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재킷에 프리미어 팀으로 활동한 년도를 자수로 새겨주는데 작년에 2024를 새겼고, 올해 2025를 그 밑에 새길 것이다. 이는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것과 다른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주는 1석 2조의 효과를 낸다. 둘째도 이를 위해 열심히 배드민턴 시합을 나가고 있다. 올해도 프리미어 팀엔 소속되지 못했지만, 운동을 즐기는 활동 자체로 좋은 학교 생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꼬리를 물고 나온 생각은, 어제 만난 작가 언니다. 어제는 큰 애의 Ball Party 드레스를 사러 종일 이곳저곳 상가를 돌아다녔다. 12, 13학년만 파티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12학년인 첫째는 올해 처음 파티에 참가할 예정이다. 드레스도 사야 되고 구두도 사야 되고 가방도 사야 되는데, 파티 때 한번 입고 장롱 속에 들어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돈 생각이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을 생각에 기대하고 있는 큰 애를 위해 생각을 접고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필요한 것들을 얼추 구입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문구팬시아트 가게인 TYPO에 갔다. 딱히 살게 없어도 습관처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 곳이다. 귀여운 컵도 있고, 양말도 팔고 노트, 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 잔뜩 있다. 그렇게 한두 바퀴를 돌며 구경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작가 언니를 만났다.


작가 언니는 한국의 유명한 동화책 작가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뉴질랜드에서 우연찮은 기회로 만나게 되어 친구가 됐다. 그분은 나와 다르게 이곳에 와서도 열심히 일과 삶을 병행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언니는 뉴질랜드에까지 와서 일을 해야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내가 볼 땐 완벽한 삶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일할 수 있는 직업이라니, 이는 엄청난 특권이다. 물론 언니는 1년 6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고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뉴질랜드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만, 내가 살아보니 일을 안 한다고 더 많이 즐기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일을 하면서 사회와 연결을 유지하면서 경제력도 뒷받침해 주고 여가를 즐기는 삶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어쨌든, 언니는 이제 7월 초에 뉴질랜드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내 남편도 6월 말에 왔다가 7월 초에 돌아갈 예정인데, 언니와 하루 차이로 떠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루 사이로 한국으로 모두 돌아가버리다니, 7월은 겨울의 한가운데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라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낼 것 같다.


우연한 만남은 괜히 더 반가운 법이다. 우리는 TYPO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가, 첫째의 볼파티 이야기를 지나 우리 집에서 다음 주에 할 송별회 겸 와인 파티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나눴다. 사는 지역이 그리 가깝지 않고 언니가 일을 하느라 나만큼 한가하지 않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 마음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는데, 다시 혼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떠나는 언니는 뉴질랜드를 떠나는 걸 아쉬워하고, 나는 떠나는 사람을 아쉬워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요즘 내가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몇 명 사귀고 있다는 것과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우울과 무력함에서 벗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예전의 나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외로움은 타인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게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혼자의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하고 있다. 나를 먼저 이해하고 발견하려고 애쓰고 있다. 점점 어른이 돼 가는 것 같다. 깊은 사고를 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가도 영원한 철부지로 남고 싶은 생각도 든다. 겉은 늙었는데 속이 철부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철부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나중에 나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귀여운 할머니가 된 나를 생각하다가 30년 전, 내가 아주 어렸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색, 냄새, 소리가 기억난다. 그때, 뭔가 노란빛의 느리고 행복한 그 감정을 생각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나오는 꿈을 꿨다. 그들이 그립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둘러앉아 왁자지껄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짧은 꿈을 꾸고 다시 깼지만, 큰애 아침밥을 차려주면서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리운 마음을 잔뜩 모았다가 겨울에 보따리를 풀어내야지. 내가 얼마큼 그리워했는지, 외로움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이야기해 줘야지.


겨울이 온다. 겨울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지만, 올해는 이상하게 담담하다. 이번 겨울은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볼까 한다. 꽁꽁 언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그리움을 글로 그려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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