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과 허영심

10 JUN 2025

by 게으른 곰

춥다. 이제 정말 겨울이 왔다. 이불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기온은 아직 영상 10도 위인데 공기가 차다. 겨울 아침을 시작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런 날씨엔 빈틈을 보이면 게으름이 금세 비집고 들어와 하루를 침대 위에서 보내기 십상이다. 사실 어제도 그런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오늘은 용기를 내 이불을 박차고 나와 옷을 껴입었다. 보드라운 옷 속에 감싸이지 못하는 내 불쌍한 두 손은 여전히 차다. 하필 수족냉증을 앓을게 뭐람. 추위를 타는 사람보다 더위가 힘든 사람이 되면 좋겠다. 세계 어디를 가나 에어컨은 있다. 하지만 난방 시스템은 왜 이런 거지? 이 나라 선조들은 대체 뭘 한 거야. 그중에 몇 명은 추위를 타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바닥 난방을 창조한 우리나라 선조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다.


엄한 이 나라의 조상들에게 툴툴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도시락으로 무엇을 만들까? 고민이 시작됐다. 요리는 언제 쉬워질까. 내 머릿속엔 요리 구역이 없거나 아주 작은 점만 한 영역밖에 없는 게 틀림없다. 재료를 살피다 어제 식초물에 담가놓은 레몬이 보였다. 레몬…


나는 왜 레몬을 샀을까?


지지난주 토요일, 그러니 9일 전 마트에서 레몬 한 망을 샀다. 레몬을 카트에 넣을 때 레몬으로 무엇을 만들까 고민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레몬을 넣은 파운드케이크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파운드케이크를 좋아하지만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뭐, 정 안되면 물 마실 때 레몬즙을 짜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고민을 조금 더 깊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서 오늘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8일 동안 싱크대 위에 올려져 있는 레몬을 매일 그저 바라보며 파운드케이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매일 느꼈다. 파운드케이크 조리법은 찾아보지도 않았다. 베이킹은 내가 넘지 못하는 산이거나 넓은 바다다. 바보 같으니라고. 이제 10개의 레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lemon.jpg 레몬은 색도, 모양도 어쩜 이렇게 예쁠까.

그러고 보니 2년 전, 뉴질랜드에서 살기 시작한 첫 해에 나는 과일 채소 박스를 집으로 배달시킨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제철 채소와 과일이 집으로 배달 됐었는데, 이맘때쯤엔 박스에 레몬이 2-3개씩 꼭 들어있었다. 레몬이 5-6개 일 때도 있었다. 그러니 레몬은 겨울 과일인 것이 틀림없다. 매주 레몬 개수가 새롭게 바뀌었다. 3개가 10개가 되더니 이내 20개 가까운 숫자가 됐다. 부끄럽지만 시들어버린 몇 개는 음식 쓰레기통에 버렸다. 레몬즙을 내어 물에 섞어 마시고, 샐러드에 뿌려먹어도 레몬은 줄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나는 레몬청을 만들었다.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레몬청 병 3개가 만들어졌다. 한 개는 앞 집 이웃에게 선물하고 2개는 냉장고에 넣고 겨울 동안 차를 만들어 마셨다. 행복한 결말이다.


올해는 레몬청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점이다. 설탕이 많이 들어가는 레몬청을 만들어 놓으면 아이들은 수시로 타먹을게 틀림없다. 지금은 단호해야 할 시점이다. 2주 뒤 남편이 오면 여행을 떠날 거고, 그럼 살이 더 붙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이 올 때쯤 큰애의 Ball Party가 있다. 드레스를 사놨으니 군살 정리를 해야 한다. 겸사겸사 나는 요리를 덜 해도 될 것 같아 좋고. 그래서 우리는 다이어트 중이다.


나는 왜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레몬을 자꾸 구입하는 걸까. 레몬 파운드케이크가 먹고 싶은 걸 지도 모른다. 레몬을 사다 놓으면 매일 그것을 바라보면서 압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나는 결국 레몬을 썰어 파운드케이크를 구울 것이라고 미래의 나에게 책임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파운드케이크를 파는 곳을 찾지 못했다. 바나나 케이크는 많이 파는데, 영 내 입맛엔 맞지 않다. 한국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파운드케이크를 배달시켜 먹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꼭 생각난다. 딱 그만큼 좋아한다.

잠깐 글 쓰는 걸 멈추고 레몬 파운드케이크 만드는 방법을 드디어 찾아봤다. 딱 8줄이다. 레몬은 준비됐으니 레몬을 준비하세요.라고 적힌 첫 번째 줄을 빼고, 일곱 줄에 적혀있는 대로 움직이면 나는 파운드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 그 일곱 줄을 실행하지 못해 갈망만 하고 있다. 바로 코앞에 있는데, 재료도 다 있는데.


요리는 왜 익숙해지지 않는 것일까. 결혼하고 처음 밥을 지어봤으니 내 요리경력은 그래도 17년이나 된다. 그중 절반은 외식을 하거나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반찬을 얻어먹었다 해도 8.5년은 내가 직접 요리를 했는데,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고수는 되어있어야 하는 시간 아닌가? 마음이 없는 행동을 아무리 오랫동안 해봤자 고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고수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오랫동안 몸담아 봤자 말짱 꽝이라는 말이다. 고작 일곱 줄 레시피인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10번 정도 더 읽고, 과정을 머릿속에서 정리한 뒤, 레시피를 보지 않고 암기해 만들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게 싫은가 보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내 머릿속을 혼란하게 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정돈되지 않은 책상이나 침대를 싫어한다. 완벽하게 정리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내 규칙대로 80-90% 정도의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이 나와 사소한 말다툼을 매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자고 일어난 침대를 정리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일어나서 침대 정리하는 습관을 만들어 주기 위해 10년 이상 잔소리를 했다. 책상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일을 10년 이상 해도 그 일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으면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일지라도 잔소리일 뿐이다.


책도 나의 허영심을 채우는 수단 중 한 가지다. 예전부터 읽고 싶은 책이나 소장하고 싶은 책을 구입했다. 구입만 했다. 읽는 건 나중으로 미뤘다. 일단 구입해 놓으면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안도감을 들게 했다. 그렇게 읽지 않은 책이 집에 쌓여있다. 우리 집 거실 한쪽벽은 모두 책이다. 그중 절반이나 읽었을까? 갑자기 결정된 뉴질랜드 여정에 내가 사놓은 책들 중 안 읽은 책을 30여 권 가지고 왔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책을 가지고 오다니. 읽기 위한 책이라기보다 마음의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호기롭게 영어 책도 몇 권 구입했다.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이북도 샀다. 가지고 온 책과 읽고 싶은 책이 다를 때가 있다. 이북은 구입하고 대부분 바로 읽었다. 역시 마음이 생길 때 읽어야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적 허영심은 뉴질랜드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의 차이가 이렇게나 큰 데 여전히 게으르다니,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이해 안 될 때가 있다.


레몬을 한참 째려보다가 사등분으로 잘랐다. 그것들을 지퍼백에 넣고 냉동실에 넣었다. 지퍼백 2개에 꽉 들어찼다. 일단 얼려놓자. 얼려놓으면 나중에 기회가 한번 더 생긴다. 결정을 나중으로 한번 더 미뤘다. 레몬 파운드케이크는 못 만들겠지만, 레몬즙으로는 활용할 수 있다. 레몬을 썰면서 또 한 번 마음먹었다. 앞으로는 레몬을 사지 말자. 예쁜 노란색에 현혹되지 말자. 뭔가 그럴싸한 요리를 내가 할 것이라고 믿지 말자. 나를 믿지 말자. 만약 다음에 내가 또, 또 레몬을 산다면 나는, 나는… 기필코 레몬 파운드 케이를 만들 것이다. 사진을 찍어 증명하겠다. 그날 쓴 글에 예쁘게 완성된 레몬 파운드케이크 사진이 올라오길,


내일의 나에게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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