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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Feb 28. 2024

모든 게 처음

우리 가족은 처음 이별을 겪었다. 공항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펑펑 울면서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창피할 정도였는데, 그땐 부끄러움보다 슬픔이 훨씬 더 컸다. 비행기에서도 울다가 자고 깨면 또 울었다. 처음 겪는 이별은 생각보다 마음 아팠다. 그렇게 슬픈 마음을 안고 도착한 뉴질랜드는 우중충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비가 왔다. 그것도 엄청 많이 왔다. 뉴질랜드에 오래 사신 분의 이야기로는 이렇게 비가 많이 온 건 수십 년 동안 처음이라고 했다. 누가 그랬다. 뉴질랜드 여름은 날씨가 정말 좋다고. 비가 거의 안 온다고 했는데, 쨍쨍한 햇살이 아름답다고, 천국이 따로 없다고 했는데 전혀 반대의 날씨였다. 아직 이별의 슬픔이 가시지 않았는데 날씨까지 우중충하다니. 며칠 동안 집에서 꼼짝도 없이 갇혀 구시렁거리다가 비가 오기 전에 뉴질랜드에 도착한 것이 그나마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뉴질랜드행 비행기는 폭우로 인해 모두 취소되었다. 


비로 인해 오클랜드 공항이 잠겼다. 차도 잠기고 집도 잠겼다. 도로도 잠기고 다리 통행이 금지 됐다. 말 그대로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정말 많이 왔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밖에 있는 야자수는 하루종일 인사를 90도로 꾸벅꾸벅 해댔다. 해변 절벽에 붙어살고 있던 나무가 절벽 흙더미가 무너지면서 같이 해변으로 내려왔다. 해변 절벽 위에 지어진 집들은 집 울타리가 절벽 끝에 다다랐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남편도 없고 영어도 못하는 나의 내일이나 걱정하자.


흙더미와 함께 해변으로 쏟아져 내려온 아름드리나무. 긴 해변에 이렇게 떨어진 나무가 꽤 많았다. 


온 나라가 홍수로 난리가 났고 당연히 학교 개학도 미뤄졌다. 낯선 외국땅에서 우리 셋은 덩그러니 꼼짝도 못 하는 신세가 됐다. 그 당시 나는 해결해야 할 숙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차도 사야 되고(차는 결국 지금도 못 샀다.), 냉장고도 채워야 되고, 살림에 필요한 소소한 물건들도 구입해야 한다. 집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알아둬야 한다. 특히 카페 위치를 알아야 하고 그다음 커피를 맛보고 단골을 삼을 카페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내게 될 집은 가스통을 배달시켜 온수와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스 배달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첫 집이 이런 방식이라 뉴질랜드에 도시가스가 없는 줄 알았다. 지금 두 번째 집으로 이사했는데, 이 집은 도시가스를 사용한다.) 해야 할 일이 가득 찬 내 머릿속은 복잡한데 아이들까지 학교에 안 가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어를 10년 넘게 배웠어도 말 한마디 편하게 하지 못했던 나는 내가 넘어야 할 산이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게 느껴졌다. 가스 회사에 전화를 걸어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단어와 문장을 총동원시켜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메일로 자세히 안내받고 가스를 배달시켰다. 게임 중 퀘스트 한 개를 해결 한 느낌이었다. 이제 앞으로 약 10개 정도의 퀘스트만 더 해결하면 된다. 창밖으로 여름 두 달 동안 방치되었던 잡초가 보인다. 퀘스트가 11개로 늘어났다.


전에 살던 집은 학교와 가깝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나의 첫 집이 되었다. 집을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 한국에서 계약을 했다. 막상 와보니 집은 많이 답답했다. 도로가에 있었던 집이라 블라인드를 열고 생활할 수 없었다. 집을 구해주신 분은 집순이가 아닌 게 틀림없다. 쳐다볼 풍경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집순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집이었다. 겨울을 원래 싫어하는데, 이 답답한 집에서 보낸 뉴질랜드의 첫겨울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해만 뜨면, 뉴질랜드는 무척 아름답다.

하늘에 구멍 난 듯 쏟아지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말로 듣던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여름이 찾아왔다. 어딜 바라봐도 아름다웠다. 비 피해가 많아 나라는 복구하느라 난리통이었지만 티브이가 없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듣는다 해도 충분히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다시 찾아온 여름을 즐겼다. 처음으로 걸어서 옆동네도 가고 마트도 가봤다. 오클랜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인  hop카드도 만들었다. 처음 버스를 타봤다. 버스는 우리나라랑 똑같았는데 타고 내릴 때 운전기사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달랐다. 좋아 보였다.  처음 뉴질랜드 삼겹살도 사다 구워 먹었는데, 우리나라 삼겹살 맛이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맛이 다르다. 조금 더 느끼한 것 같다. 처음 뉴질랜드 와인도 한 병 샀는데, 그 뒤로 뉴질랜드에서는 와인만 마신다. 싼 값에 비해 맛이 훌륭하다. 처음 가본 집 뒤쪽에 있는 커피숍엔 맛있는 커피와 함께 여러 가지 빵도 팔고 있었다. 단골 커피숍이 정해졌다. 나중에 이곳에서 이든을 만난다. 그는 만화가인데, 늘 커피숍에서 그림을 그린다. 나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엉망인 영어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다. 그 뒤로 종종 커피숍에서 우리는 인사를 나눈다. 첫 키위 친구인 닉과 클로이도 만났다. 둘은 우리 옆집에 살고 있었던 이웃인데, 지금 나는 그들이 살던 집으로 이사를 와있다. 


어쩌다 보니 우당탕탕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우울했고 행복했던 첫 해가 지나갔다. 첫 해라 수많은 처음을 겪었다. 나는 뉴질랜드의 처음이 힘들었던 것 같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인데 힘들고 어려울 땐 그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혼돈 속에서 무언가 나는 배우고 성장했다. 뉴질랜드에서의 두 번째 해가 시작 됐고, 작년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남편과의 두 번째 헤어짐도 역시 눈물바다였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 항상 함께하고 있고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순간도 언젠가 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웅크리고 징징거릴 것인지 또 다른 새로움과 마주해 경험하고 배울 것인지를 선택하면 된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시간은 간다.


앞으로도 처음을 많이 겪을 것이다. 어제는 잔디 깎는 분이 처음 집에 방문했다. 이발한 뒷마당은 조금 더 정돈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두렵고 걱정스럽지만, 겪고 나면 별일 아니다. 그저 선택하면 된다. 내가 선택한 시간들이 쌓여 경험이 되고 나의 삶이 된다. 언젠가는 떠날 이곳이 나중에 그립지 않게, 실컷 실수하고 넘어지고 창피함을 일기에 적고, 또 선택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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