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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Feb 21. 2024

머리보다 잽싼 몸

'애들 뉴질랜드에서 공부시키는 거 한 번 생각해 봐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한마디가 지금 내가 뉴질랜드에 있는 이유다.


뉴질랜드행을 결정하기 전, 둘째까지 중학생이 된 집은 공부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느라 매일 늦게 들어왔고 나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한 마디로 학교 공부와 학원 공부 스케줄로 하루가 꽉 차있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에게 집이란, 잠을 자고 어딘가로 나갔다 돌어오는 정류장 같은 느낌이었다. 앞 집, 옆 집, 뒷 집 모두 어디론가 무언가를 쫓아 열심히 가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학원을 다녀온 후에도 학원 숙제에 시달렸다. 아직 중학생인데 새벽까지 잠을 못 자는 날이 허다했다. 마음속에서 계속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꾹 눌러 담으며 살았던 것 같다. 딱히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고 난 이미 이렇게 살 게 될 거라는 것을 예상했다. 학원 선생님들은 아이들 공부가 너무 늦었다며, 왜 여태 공부를 안 시켰냐며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았다. 학원을 너무 늦게 보내 그것이 아이들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뿐만이 아니고 모든 엄마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인생엔 공부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나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골에서 보낸 그 시간이 지금도 나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는 걸 여러 번 느낀다.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자연에게서 배웠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기억들은 여러 모습으로 나의 삶의 자양분으로 돌아왔다.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도시에 터를 잡았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 아이들이 시골에서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연을 가까이 두고 자연 속에서 성장하길 바랐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었을 때 양평으로 이사를 가려고 집을 많이 보러 다녔다. 결국 이사는 가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에 남기로 결정한 그때, 나는 나의 앞날을 예상했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공부에 파묻혀 자라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구들과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밤 10시까지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아이들보다 내가 못 견뎠던 것 같다. 아이들은 친구들 모두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상할 이유가 없다. 그게 맞는 것이다. 오히려 학원을 다니지 않는 것을 불안해했다. 내가 대단한 사명감이나 교육관이 있어서가 아니고 아이들의 삶이 팍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른이 되기 전까지 거쳐야 할 관문이라 여겼다. 


아이들이 학교 시험을 앞둔 어느 날, 아이들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는 영어 선생님이다. 아이들 영어에 대해 물어볼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우연히 나온 말이다. '언니, 애들 뉴질랜드에서 공부시키면 어때요?' 외국에서 공부하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가족이 떨어져 사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 내 마음에 콕 박혔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남편과 떨어져 사는 건 끔찍하게도 싫었지만, 많은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영어권 나라 중 캐나다와 뉴질랜드를 고민했다. 캐나다 유학원에 가서 내가 한 첫 질문은 공부나 학교에 관한 것이 아니고 '많이 춥나요?'였다. 참을만하다고 말할 법도 한데 그분은 나에게 '춥긴 춥죠.'라고 대답했고 그날 캐나다는 선택지에서 지워졌다. 호주는 여러 지인이 안 좋은 이야기를 해서 제외했고, 미국 영국은 총기 사고나 금전적인 이유 등으로 제외시켰다. 뉴질랜드가 남았다. 어쩌면 애들 고모한테 처음 뉴질랜드로 가라는 말을 들어서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날씨와 자연, 두 가지를 보고 결정했다. 어차피 공부는 아이들의 몫이다. 그들의 각자의 꿈 크기만큼 공부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공부 외에 그들이 이곳에서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이 그들이 살아갈 때 힘이 될 거라 생각한다. 자연을 누리고, 넓은 잔디에서 맨발로 공을 차고, 체육 시간에 바다 수영을 하며 세계 각지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학교 공부보다 더 큰 삶의 자산이 될 것이다.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처음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아빠와 떨어져 살기 싫다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우리 가족은 모두 뉴질랜드행에 찬성했다.


언젠가 애들 고모가 나에게 '언니가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바로 갈 줄은 몰랐어요.'라고 했다. 남편은 옆에서 '말 조심해야 돼. 이 사람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일단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동생에게 너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서 산다며 괜한 타박을 줬다. 내 삶은 항상 옳다고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 뉴질랜드에 와있다. 내가 어쩌다 이 먼 곳까지 오게 됐을까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선택한 길이 완벽히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철이 든다. 셀 수도 없는 후회와 책임감, 인내를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철이 드는 중이다. 밝고 명랑했던 시골 소녀는 이제 가족과 나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바다건너까지 넘어와 내색하지 않고 인생을 한탄하며 살고 있지만, 책임감이 훌쩍 커버린 나는 이 시간도 나중에 추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큰 아이는 양궁부에 들어 요즘 한참 대회를 다니고 있고 오늘은 두 아이 모두 2024 school Library Team(도서관 사서)에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아이는 클럽을 6개나 신청해 시간이 겹치는 2개를 놓고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고, 작은 아이는 없던 꿈이 생겼다. 그 꿈이 너무 커서 걱정이지만, 못 이뤄도 어때! 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꿈이 없던 아이가 꿈을 품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어렵고 힘들 때도 많겠지만, 가슴에 들어온 희망은 다른 모습으로 힘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내가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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