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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Mar 13. 2024

겨울 최저 기온, 영상 7도. 껌이지.

언젠가 사상체질을 한의원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의 조각은 의사의 입이 움직이고 있고 내가 무슨 체질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장면인데, 소리가 꺼져있다. 이미지를 기억하고 알맹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흔한 일이다. 내가 스스로 내린 판단은 '소음인'이다. 인터넷에서 사상체질의 특징을 읽어봤는데 눈에 들어오는 한 단어가 있었다.


'수족냉증'


그래서 나는 소음인이다. 나는 겨울에 수족냉증을 앓는다. 겨울이 싫다. 손끝, 발끝부터 서서히 밀려오는 추위는 온몸을 점령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른 소음인의 특징 중 하나가 소화기관이 약한 것인데 나는 소화기관이 약한 것 같다. 특히 지금보다 젊었을 때 위통이 잦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위가 딱히 불편한 느낌은 없다. 지난겨울 건강검진을 할 때 의사가 위가 불편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의사가 어떤 증상이 있냐고 물었다. '별다른 증상은 없어요.'라고 대답했고 의사는 나를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럼 왜 불편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의사의 말에 대답할만한 증상들을 뒤지고 있었다.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왜 위장이 약하다고 생각했을까. 위 내시경은 표재성 위염이 나왔다. 그리고 콜레스테롤 약을 처방받았다.


콜레스테롤 약을 챙겨 뉴질랜드로 건너왔고 한 달 반이 지났지만 약은 아직 한 달 치도 먹지 못했다. 다시 낯선 땅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사이에 이사도 했다. 이사를 마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가을이 왔다. 뜨겁고 아름다운 여름이 이미 지나고 어느새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난주와 이번주에 비가 많이 온다. 뉴질랜드의 겨울은 5,6,7,8,9월(내 기준)인데 평균 최고기온 14도, 최저기온 7도이다. 겨울 동안 흐린 날이 59%, 대체로 맑은 날은 나머지다. 해 뜨는 시간은 오전 7시 30분, 해 지는 시간은 오후 5시다. 이곳은 오클랜드지만 한국의 도시와 전혀 다른 풍경인데, 겨울이 되면 5시부터 암흑이라는 말이다. 편의점도, 술집도 없는 주택가는 어둠이 깔리면 정적만이 존재한다. 겨울에 해가 7시 30분에 뜨는 것은 여름동안 매일 한 시간씩을 아껴둔 덕인데, 서머타임이 아니라면 해는 한 시간이 더 늦게 뜰 것이다. 전기를 아끼고 해를 많이 보자는 이유로 뉴질랜드는 서머타임을 적용하고 있다. 남반구에 위치한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인데, 우리나라의 여름이 습하듯 이곳은 겨울이 습하다. 비가 많이 오니 당연한 얘기다. 작년에 정보 없이 마주친 뉴질랜드의 겨울은 나에게 큰 시련이었다. 거의 매일 비가 오니 빨래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건조기가 없었던 전 집은 빨래를 실내에 널고 제습기를 종일 틀어놨다. 제습기를 틀지 않으면 빨래는 3일이 지나도 마르지 않았다. 비가 매일 오고 흐린 날이 이어지고 하루 중 절반 이상 어둠이 깔리는 뉴질랜드의 겨울은 친구 한 명 없는 나에게 악몽과 같은 시간이었다. 이때 둘째가 잠깐 로잉을 하러 다녔는데, 오전 7시에 훈련장소로 집합을 해야 했다. 6시 30분에 집을 나섰을 때 암흑 같은 어두움을 헤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뉴질랜드의 겨울은 내가 싫어하는 3종 세트를 모두 갖췄다. 


추위.

얼굴 보기 힘든 태양.

비.


게다가 길다. 우리나라의 겨울은 12월, 1월이 바짝 춥고 서서히 기온이 오르는 걸 느낄 수 있는데 이곳은 한결같은 온도가 몇 달 계속된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그 스산한 추위가 6개월 정도 이어지는 것 같다.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인 감정이라고 하면 딱 맞다. 습하고 어둡고 스산하다. 손과 발 끝에서부터 서서히 퍼지는 추위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영하로 내려가는 분명한 추위였다면 온돌이 이곳에도 존재했을까. 애매하게 추운 날씨는 별다른 난방 시스템 없는 애매한 상태로 버티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벽난로 대신 히트펌프가 난방 수단으로 대체되었는데, 뜨거운 공기가 나와 집안의 찬 공기를 데우는 형식이다. 난방 기구 전원을 끄면 잠시 숨어있던 음산한 추위는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따뜻해진 공기를 잡아 삼킨다. 추위를 잘 느끼는 나는 한겨울에도 열을 품은 한국의 집이 매우 그리웠다. 게다가 카펫도 깔려있지 않았던 첫 집은 그야말로 얼음장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카펫이 왜 필요한지 겨울을 겪고 깨달았다. 유일하게 먼지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추위보다 카펫이 깔린 집에서 재채기를 하며 사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끔찍했던 기억의 겨울이 다시 스믈 스믈 다가오고 있다.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은 구름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작년 겨울과 이번 겨울의 차이점은 집이다. 이사를 했다. 다행히 이사한 집은 창문이 많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많다. 답답하지 않은 집이라 다행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처음이 아닌 두 번째 맞는 겨울이라는 점이다. 한번 겪어본 것과 처음은 하늘과 땅 차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길고 긴 겨울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계획도 세울 수 있다. 계획은 없지만 이미 겨울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다. 오늘도 한 무더기의 검은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본다. 구름에 가려진 해는 얼굴을 내밀기가 무섭게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바람은 구름과 한통속이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집은 곰팡이로 뒤덮이겠지. 바람은 먹구름을 계속 밀어내고 다시 끌고 올 것이고 나는 겨울 내내 곰팡이를 닦아 없애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경험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나는 1월에 한국에서 배로 소포를 보냈고 이제 곧 도착할 것이다. 그 안에는 발 워머와 난로, 두꺼운 양말이 잔뜩 들어있다. 그것들로 지난한 겨울을 견뎌보자. 


뉴질랜드에서 살기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겨울 기온이었는데, 이렇게 애매하게 추운 날씨덕에 애매한 난방 문화가 따라올 줄이야.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차라리 여름에 팍! 덥고 겨울에 팍! 추운 나라였다면 더 나았을까. 게다가 계절이 반대라 한국이 더 그리운 것 같다. 오들 오들 떨고 있을 때 한국은 여름이니, 차라리 북반구 나라로 이사 갈 걸 그랬나 보다. 겨울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것만 따졌지, 내가 일 년에 겨울만 두 번을 겪게 될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뉴질랜드는 여름인 12월 1월이 긴 여름 방학이다. 우리는 이때 한국에 머무른다.) 아직도 생각이 짧다. 특히 나처럼 성격 급한 사람들에겐 신의 한 수라 여긴 그 수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질 수 있으니, 큰 결정을 앞두고서는 꼼꼼히 조금 더 이것저것 따져보고 결정하자. 이제와 후회한다고 날씨나 내가 바뀌는 건 없을 테니, 소포가 하루빨리 도착하기를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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