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는 중고거래가 활발하다. 모든 물건을 되팔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 청정국인 뉴질랜드는 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다. 당연히 공산품의 가격도 비싸다. 중고 거래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당근이 있다면, 이곳은 작은 마을이나 큰 마을, 어디를 가도 중고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누가 그랬다. 뉴질랜드엔 도둑이 많다고. 하지만 강도는 없으니 안심하라고. 안심해도 될까? 혼자 되뇌었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뉴질랜드엔 도둑이 많지만 내가 겪을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주택지엔 집 앞 도로에 주차를 많이 하는데, 길가에 세워진 차 안에 동전이라도 보이면 차 유리를 깨고 동전을 가져간다고 했다. 내 이웃이었던 닉도 당했고, 같은 동네 한국분도 당했다. 볼일이 있어 그분 집에 갔다가 현장을 눈으로 목격도 했다. 차 안에 영양제를 넣어두고 깜빡했다고 했다. 차 앞 유리는 산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무척 놀라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내 일처럼 와닿지는 않았다.
얼마 후 드디어 우리 집에도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우리 집 창고에 넣어둔 딸 친구의 자전거를 훔쳐갔다. 자전거로 통학하는 딸 친구는 그날 아침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부상을 입었다. 도저히 자전거를 끌고 집에 갈 수 없어 학교와 가까운 우리 집에 맡겨둔 상황이었다. 기가 막히다. 내내 비어두었다가 자전거를 창고에 넣어둔지 며칠 후 자전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확히 자전거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 창고 유리 중 한 면이 투명 유리여서 멀리서 보고 가져갔을 거라고 닉은 말했다. 게다가 창고문도 잠그지 않았는데,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창고는 집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야 하는 은밀한 곳에 문이 있다. 집 구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문의 위치를 찾기 쉽지 않다. 이건 주택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생각일 수도 있다. 전문가(?)는 잘 알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둘째, 부동산에서 창고 열쇠를 주지 않았다. 나도 딱히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창고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셋째,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문을 잠그지 않고 물건을 보관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자리에 두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놓친 건 한국에서도 노트북은 안 훔쳐가지만 자전거는 훔쳐간다는 사실이다.
잠금장치 하나 없는 창고에 너무 손쉽게 들어간 도둑은 창고 안쪽에 연결된 문을 통해 집주인의 물건까지 다 헤집어 놨다. 집주인 물건 중 뭐가 도난당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사실을 부동산에 알렸는데 집주인은 여태 창고에 흩어진 짐을 정리하지 않고 있다. 딱히 중요한 물건은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딸 친구는 구입한 지 몇 달 되지 않는 새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웃이었던 닉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함께 창고로 갔을 때, 나는 닉에게 문 손잡이를 되도록 만지지 않고 문을 열려고 애쓰며 말했다. '혹시 경찰이 지문을 채취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손잡이는 건들지 않았어.' 내 말을 들은 닉은 웃으며 손잡이를 맨손으로 잡았다. 형사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그러고 보니 태교를 CSI로 했다. 닉은 투명 유리 창문이 밖에서 보이지 않게 빈틈없이 박스를 쌓아 올렸고 나는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 신고하면 도둑을 잡을 수 있겠냐고 물은 대답에 닉은 아니라고 말했다.
두 번째 도둑의 이름은 히쿠다. 첫 번째 도둑은 나이도 성별도 이름도 모르는데 두 번째 도둑이었던 히쿠는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안다.
그때는 오후 4시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온 큰애와 거실에서 별다른 일 없이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검은색 후드를 입고 있는 30대 후반정도 돼 보이는 남자였는데 우리를 보고는 당황해하며 사과를 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나와 딸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했고 나는 이내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너 왜 노크도 없이 우리 집 문을 그냥 열었어?"
"아, 미안해. 나는 지금 열쇠를 찾고 있어. 내가 오늘 네 옆집에서 잘 거거든. 근데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네."
나는 그가 가리키는 집에 사는 사람을 잘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그가 에어비엔비 같은 숙박시설을 통해 예약을 하고 온 사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때는 영어가 지금보다 더 안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되지 않은 부분은 내 생각대로 채웠던 것 같다. 에어비앤비가 바로 그 첫 번째 상상이다.
"전화해 봐."
"나는 전화기가 없어. 며칠 전에 잃어버렸어."
"내 거 빌려줄게."
"@#($@#*$@*$%@"
그는 대답했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댔던 것 같고 그는 내가 건넨 내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너 이름이 뭐야? 나는 히쿠야"
"내 이름은 알려줘도 너희 키위들은 발음을 잘 못해."
"뭔데?"
"슬기"
"셜기"
우리는 통성명을 하며 악수도 나눴다. 그는 내가 만난 키위들 중 내 이름을 제일 정확하게 발음했다. 내 이름을 거의 정확히 발음하는 그를 보고 들뜬 나는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우리 집 문을 '노크'하라는 말을 전하며.
집에 들어와서 그를 관찰했다. 그는 여전히 열쇠를 찾고 있었다. 우체통, 계단, 쓰레기통 이곳저곳을 계속 찾았다. 여기서 나는 그를 도둑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도둑이라면 나와 대화를 나눈 뒤 떠났어야 했다.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계속 열쇠를 찾을 리는 없다.
그는 맨발이었는데 그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뉴질랜드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꽤 많다. 마트에서도 흔히 본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맨발로 다닌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우리 집 둘째도 종종 신발을 벗고 걷는다. 바다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게 그렇다. 히쿠는 옆집 계단 앞에 한 무더기 옷도 쌓아뒀다. 여행을 특이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옷차람도 조금 허름했다. 자유로운 여행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의 동향을 살피며 다른 일을 하다가 문득 밖을 봤는데 경찰이 보인다. 3명이었는지 4명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제복을 입은 경찰이 우리 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경찰차도 보인다. 조금 있으니 닉도 보인다. 회사에서 일을 할 시간이다. 게다가 처음 보는 사람들도 모였고 그들은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집 주인인 젊은 남자만 없다. 이게 무슨 일이지? 밖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사람 중 나이 드신 여자분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니?"
"응? 응"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와중에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저는 XXX입니다. 제이콥 아빠예요."
"저는 XXX에요. 제이콥 엄마죠."
"그리고 동생입니다."
그들은 옆집 남자 제이콥의 가족이었다. 나는 이 당시 제이콥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다. 가끔 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거나 집 안에 있는 모습을 밖에서 지나치며 보는 사이였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나는 제이콥 엄마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가 도둑이라는 것이다! 닉의 아내인 클로이 아니면 제이콥의 아내가 집 안에서 나와 도둑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경찰에 신고를 한 것 같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가 도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나는 제이콥 엄마에게 그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했고 제이콥 엄마는 경찰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경찰과 앉아서 진술서를 적고 있었다.
살면서 도둑도 처음 겪어봤고 영어도 부족하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하지 않은 나는 경찰의 질문에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언어적 한계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영어를 잘못해서 안타깝다."
"무슨 소리를. 나도 한국어 못해."
상냥한 경찰과의 진술서 작성이 끝나고 닉은 우리 집에 같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위해 설명을 자세하게 해 줬다. 히쿠의 가방에서 고기가 나왔다고 한다. 난 가방에서 고기가 발견된 이야기를 닉이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Meat?"이라고 나는 되물었다. 가방에서 고기가 나온 게 왜? 이런 느낌이었다.
닉은 구글에서 고기 사진을 검색해서 보여줬다. 내가 MEAT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정도는 아닌데, 이 와중에 자존심이 상했다. 도둑들이 독을 뿌린 고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개를 키우는 집을 털 때 개에게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놀랐다. 한국은 도둑이 많지 않을뿐더러 독이 든 고기를 개에게 주기 위해 가지고 다닌다니. 그제야 소름이 돋았다. 상황 파악을 이제야 했다. 나는 바보다.
닉은 한참 동안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었고, 아무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하고 떠났다.
그렇게 히쿠는 잡혀갔다. 그는 왜 나와 헤어진 뒤에도 거길 떠나지 않았을까. 왜 열쇠를 계속 찾았을까. 혹시 그날 제이콥의 집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은 걸까? 훤한 대낮에 도둑질을 시도하는 게 흔한 일인가? 히쿠는 왜 그랬을까? 게다가 메인 도로 바로 앞에 있는 집을.
그렇게 두 번째 도둑과의 만남이 있었다. 2023년 9월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히쿠와의 만남은 올해까지 이어졌다. 그 기억을 잊고 지내던 2월, 뉴질랜드 번호로 전화가 왔다. 경찰이다.
히쿠가 재판을 받나 보다.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다고 한 건지, 받을 예정이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한번 방문을 해달란다. 끝난 게 아니었다. 경찰은 나를 위해 통역을 준비하겠다고도 했다. 매우 귀찮은 일이 생겼다. 아는 사람도 한 명 없는 뉴질랜드에서 어쩌다가 경찰서까지 갈 일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세월아 네월아 모든 일이 느린 뉴질랜드는 나를 언제 부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뉴질랜드를 언제 떠나는지를 물었고 여름 방학 때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했으니 그전에 연락이 올 것이다.
히쿠, 나와 즐겁게 대화를 나눴던 그는 아무것도 훔치지 못했고, 나는 꽤 귀찮은 일이 생겼다. 둘 모두 얻은 건 없고 각자 의도하지 않은 일만 벌어졌다. 닉도 이사 간 마당에, 나는 이제 정말 도움 받을 곳도 없단 말이다. 평화로운 뉴질랜드에 살면서 평화로운 일만 겪고 돌아가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