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방학이 시작됐다. 한국에서 남편이 왔다. 우리 가족은 두 달 만에 다시 모였다.
공항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많은 사람이 나왔는데 남편만 나오지 않고 있다. 설렘에서 걱정으로 바뀔 무렵 남편이 큰 웃음을 띠며 나왔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달려가 안겼고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우리는 공항에서 사진을 찍어 양가 부모님에게 전송한 뒤 렌트한 차를 찾기 위해 이동했다. 아직 뉴질랜드에서 차를 구입하지 못한 나는 남편이 올 때마다 차를 빌리고 있다. 렌트비를 보태 차를 샀으면 더 나았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처음에 차를 구입하지 못한 나는 차의 기준이 점점 더 까다로워 지다가 이젠 포기상태가 되었다. 차를 몇 번 사려고 시도했다가 엎어져 버린 경험이 쌓여 더 그렇다. 한번 미뤄진 일은 실행이 더 어려운 법이다.
이 말은 즉, 남편도 나도 우핸들 차량과 좌측 차선 운전에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다. 게다가 남편이 도착한 시간은 이미 해가 넘어가 밤이 시작되고 있을 시간이었고 그날은 오후부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도 같지만 애써 무시하며 렌트한 차를 인계받았다.
작년 뉴질랜드에서 처음 운전하던 날, 우리 가족 넷은 모두 숨을 죽이고 말을 아꼈다. 첫 운전은 내가 했는데 아무래도 어제까지 오른쪽 도로를 달리던 남편보다 몇 달 운전을 쉰 내가 더 쉽게 적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출발하기 전, 나는 모두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소리를 지르거나 당황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거북이 속도로 운전을 시작했다. 공항 주변을 벗어나고 고속도로를 타고 오클랜드 시내와 오클랜드 북쪽을 잇는 하버브리지를 건널 때쯤 나는 왼쪽 도로 주행에 벌써 적응이 된 것 같았다. 무사히 집까지 왔을 때, 은근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신호가 복잡한 도로에서 뒤차의 클랙슨 소리를 몇 번 듣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다. 가라고 하면 가면 되는 것이다. 뉴질랜드 도로는 갈라지는 방향도 많고 신호도 한국보다 조금 더 복잡했지만 위험을 느낄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길을 잘못 들어서면 그냥 계속 앞으로 가면 된다. 옳은 길을 내비게이션이 다시 찾아줄 것이다. 이렇게 지난번 운전은 모든 것이 수월했다. 딱 한 가지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 일은 남편이 돌아가는 날 일어났다. 공항 근처에서 주유를 하고 렌터카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나는 역주행을 한 것이다. 다행히 차가 한 대도 없는 빈 도로였다. 아니, 빈도로였기 때문에 역주행을 했다. 비어있는 도로로 진입하는 순간, 내 본능은 오른쪽 차선을 택했다. 그렇게 조금 달리는데 정면 멀리서 차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때 처음 든 생각은 '아차!'도 아니었고 '아, 내가 잘못 들어왔네.'도 아니었다. 그냥 물음표였다.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채워지고 있었고 반쯤 물음표가 찼을 무렵 급히 차선을 바꿨다. 며칠 동안 앞 차와 옆차, 뒤차가 내 운전을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을 마지막날 깨달았다. 빈 도로에서 오른쪽, 왼쪽의 차선을 선택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무의식의 운전상태에서는 언제든 오른쪽 차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참나, 이렇게 모든 일은 마음을 놓을 때 위기가 찾아온다.
이렇게 한번 실수한 터라 이번엔 은근 긴장했다. 그리고 이번엔 흰색차가 우리 앞에 서있다. 남편은 본인이 운전을 하겠다며 운전석에 앉았고, 나는 내심 걱정이 됐다. 남편은 한국에서도 밤 운전을 어려워한다. 그래도 지난번에 운전을 큰 문제없이 잘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잘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말렸어야 했다. 남편이 비 오는 날, 게다가 밤에 운전하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로 45분 걸리는 거리를 1시간 30분을 운전해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과 나는 녹초가 됐다. 운전 시간이 길어서가 아니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긴장하며 운전을 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의 밤은 한국처럼 밝지 않다. 주택가가 많고 고속도로를 제외하면 대부분 흐린 가로등이 덩그러니 길가에 듬성듬성 서있는 게 전부다. 게다가 비가 오고 있었는데, 차선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앞차를 따라가는 게 최선이었는데 하필 매번 신호에서 걸려 우리가 선두가 되었다. 남편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자꾸 놓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느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크게 돌면서 옆차와 부딪힐뻔했다. 나는 보조석에 앉아있었는데 오른쪽 커브를 돌며 옆차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고 소리를 빽 질렀다.
"으악, 여보!!!!"
옆차가 10cm 정도 간격까지 옆에 붙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옆차, 뒤차, 그리고 그 뒤차까지 모두 우리를 향해 클랙슨을 울려댔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신경질을 부렸다. 남편도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살고는 봐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 와중에 남편의 휴대폰은 업무 전화로 계속 울렸다. 뉴질랜드는 운전 중 전화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또 한 번 길을 잘못 들어섰고 그 덕에 한적한 도로에서 우리는 자리를 바꿨다.
우리는 둘 다 한국에서 운전을 20년 가까이했다. 남편이 뉴질랜드에 왔을 때마다 우리는 수월하게 운전을 했다. 10분 정도가 지나면 반대 차선 주행이 얼추 적응됐다. 이번엔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다. 길을 잘못 들어서는 일이 반복됐고, 옆차, 뒤차는 우리에게 계속 경고를 보냈다. 오히려 밖에서 보는 우리 차는 평온해 보였을 것이다. 차 안은 거의 전쟁 중이었다. 아이들은 불안해했고 나와 남편은 극도로 예민해져 서로를 탓하는 대화를 계속 나눴다. 그 후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뾰로통한 마음으로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다른 일로 다툴 때와 운전할 때의 다툼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다. 차는 보험이 들어있으니, 조금 망가져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생사가 달린 문제는 내가 감정을 제어한다고 제어되는 게 아니다. 위험을 느끼면 목소리가 커지고 한번 불안해진 마음은 점점 더 불안을 키운다. 운전 연수를 가족 간에는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이유를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됐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은 진리였다.
야속하게 비는 계속 내렸고 우리는 오클랜드 외곽의 마을을 모두 한 번씩 찍고 겨우 고속도로에 다시 올라탔다. 그대로 집까지 쭉 올라가면 되는데 오클랜드 시티에서 길을 또 한 번 잘못 빠져 시티 한복판까지 한번 훑고 집에 도착했다. 한국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본 뒤 맛있는 저녁을 해 먹으려 했던 계획을 접고 집 근처의 뉴질랜드 마트 중 하나인 Woolworth에 들러 신라면을 사 그것으로 저녁을 때웠다. 상할 대로 상한 기분으로 비 오는 날 밤 운전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다음 날 남편과 차로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며 운전을 익혔다. 맑은 날 낮의 운전은 금방 적응됐다. 어제는 오래간만의 운전이라 안 그래도 긴장됐는데 밤이었고, 게다가 비까지 와서 혼돈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오래간만에 만난 부부는 운전 때문에 만나자마자 싸웠다. 남편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하는 사람이다. 남편이 운전을 할 때, 나와 대화를 나누면 차의 속도가 느려진다. 대화를 마치면 속도는 다시 빨라진다. 일정한 속도로 운전을 하면서 옆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사실 별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기분 좋은 만남의 기분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한데, 첫날을 그렇게 싸우며 보내고 말았다. 우리는 늘 그렇듯, 금방 풀어졌지만, 첫날의 기억이 싸움으로 남게 된 게 지금도 무척 아쉽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운전은 내가 한수 위다.
이제 3일이 남았다. 남편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전에 많이 보고, 많이 웃고, 많이 먹고, 많이 사랑하며 시간을 채워야겠다.
단, 운전은 내가 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