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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Apr 24. 2024

요상한 가족

"도로롱 퓨, 도로롱... 퓨, "


귀 옆에서 작게 들리는 리듬 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5시 57분이다. 나는 6시가 되기 전 종종 눈을 뜬다. 알람은 7시에 맞춰져 있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자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아 밖은 어두웠고 집은 조용했다. 오직 작고 리듬감 있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남편이 작게 코를 골며 아이 같은 얼굴로 잠을 자고 있다.


남편이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왔다. 10일 일정이다. 우리는 떨어져 지낸 지 70여 일 만에 다시 만났다. 지난밤, 험난한 뉴질랜드의 좌측 도로 주행을 무사히 넘기고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아침을 맞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마음이 편안하다. 한 사람의 존재가 이만큼이나 묵직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줄이야. 그는 코를 골고 자고 있을 뿐인데 나는 왠지 조금 들떴고 괜히 신이 났다. 다시 누워 남편의 얼굴을 바라봤다. 


남편은 피부가 하얀 편인데, 그래서인지 얼굴에 주근깨가 많다. 하나, 둘, 셋.. 숫자가 열개를 넘어가고 나는 세는 걸 멈췄다. 아직 오른쪽 눈두덩이에 있는 주근깨도 다 세지 못했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다. 삐죽 튀어나온 코털 한 개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뽑고 싶은 마음으로 근질거리는 손을 거뒀다. 고이 자는 사람을 깨울 수는 없다. 그리고 자세히 봐야 눈에 띄긴 하지만, 확실하게 제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하는 눈 옆 잔 주름에서 다시 한번 눈길이 멈췄다.


"많이 늙었네, 우리."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말했다. 작게 말했지만 조용한 공기를 흔들기엔 충분했다. 남편이 실눈을 떴다. 그리고 이내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여보, 나 지금 정치인 만났어. 기다려봐."


남편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더니 이내 다시 낮은 리듬 있는 소리를 만든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남편의 단골 멘트 중 하나는 '아, 나 지금 진짜 흥미진진한 꿈 꾸고 있었는데! 다시 자야 돼.'다. 꿈을 이어서 꿀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내 남편이다. 남편은 잠을 잘 잔다. 결혼을 하고 잠자리에 든 지 1분 만에 코를 고는 남편을 나는 참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그때 나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30분 이상 책을 보거나 어떤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나는 남편과 10년 넘게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잔 덕인지, 요즘은 누운 지 5분 만에 잠이 든다.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여러 방면에서 느낀다. 

나는 필요한 시간만큼 수면을 취하면 자연히 잠이 깨는데 남편은 10시간도, 12시간도 잔다. 그래서 늘 내가 먼저 일어나고 남편은 나의 부산스러움에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깬다. 그래서 꿈을 이어서 꿀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 돌아누운 남편을 뒤에서 안았다. 남산만 한 배가 만져진다.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퉁퉁 배를 건드렸다. 남편은 내 손을 움켜쥔 채고 다시 잠에 든다. 넓은 등 뒤에 붙어 있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해가 뜨고 방이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햇살이 방 안 침대 가까이까지 들어왔을 때 큰 애가 일어났다. 그리고 온 가족이 기상했다. 남편이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우리 집은 조용할 틈이 없다. 남편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다.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크고 이런저런 작은 사고도 잘 친다. 아이들과 아직도 몸으로 놀아주고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를 기막히게 생각해 내는 창의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해준 음식을 참 잘 먹는다. 어느 날은 내 입에도 별로인데, 맛있다고 잘 먹어준다. 


식사 후 아이들은 아빠와 마당에서 배드민턴과 골프를 쳤다. 골프채와 공은 나눔으로 얻었다.(뉴질랜드는 중고 거래가 매우 활발하다.) 13번도 더 쳐서 겨우 공을 구멍에 넣었지만 아이들과 남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내내 웃고 뒹굴고 난리다. 옆집 이웃에게 너무 소란스럽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나만의 몫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동하며 그것을 웃음으로 바꾸는 그를 보고 있으면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는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신고 있는 신발을 가지고도 재미있는 놀이를 만들어 낸다. 남편과 함께 머무는 동안 종일 웃음이 집을 메웠다.




그리고 평소보다 쓰레기가 1.5배 늘었다. 남편이 와서 이것저것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고 평소보다 풍성한 식사를 차리고 있다. 내 요리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도 내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엄지를 세우며 맛있게 먹어주는 그를 위해서다. 일 년에 2달밖에 먹지 못하는 내 요리를 최대한 많이 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평범한 가족의 모습으로 지냈다. 다만 짧은 기간에 전부 누려야 했기에 매일 맥주를 즐겼고, 며칠 여행을 다녀왔고, 외식을 자주 했다. 결국 입안이 헐었다.


"여보가 오고 입안이 헐었어. 진짜 피곤하다. 여보는 1.5인분이야. 모든 면에서."


라며 괜한 투정을 부렸다. 남편은 늘 그렇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남편은 에너지도 남들의 1.5배, 웃음도 1.5배, 우리 집 분위기도 1.5배 상승시키고 먹는 것도 1.5배다. 그리고 내 인생을 1.5배 즐겁게 살게 해 준다. 

아직 목마 태우는 게 가능하다니! 아직 튼튼한 아빠다.

우리는 10년 넘게 함께 살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졌고 다름은 배울 점으로, 비슷함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꽤 균형 있게 해 오며 살던 우리 가족은 균형이 무너진 삶을 2년째 살고 있다. 아이들이 공부할 나이가 되어 불균형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억지로 위로하고 있지만, 사실 아이들에게 아빠의 빈자리는 클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자만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공부할 나이가 되었고, 3-4년의 이별은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로 살고 나서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각자의 역할 수행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족의 구성원 중 누구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족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같은 공간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것으로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 안정을 느끼게 하며 행복과 더 나아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아차차, 나는 항상 해봐야 배우고 느낀다. 안 해보고 미리 알 수는 없는 걸까.




남편이 떠났다. 시끄럽던 집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 큰 소리도 없고 딱히 신나는 일도 없다. 골프공과 골프채는 마당을 나가는 문 옆에서 역시 고요를 지키고 있다. 오늘 아침은 간단히 달걀 프라이로 때웠다. 채소는 귀찮아서 씻지 않았다. 식사 후 나와 아이들은 책을 읽고 해야 할 각자의 일들을 했다. 우리 집 잔디를 깎아주는 마크는 아침 일찍 와서 잔디를 깎아줬고, 나는 그에게 괜히 학교 방학이라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다. 모든 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왔다 갔나? 아빠가 왔다 간 게 꿈같아. 왜 실제가 아니었던 일 같지? 너희들은 어때? 아빠가 진짜 왔었어??"

아이들에게 물었다. 바보 같은 말이다. 나는 내 안이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찬 걸 느낀다. 조금 더 이곳 삶에 자신 있어졌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다. 이 모든 건 남편이 다녀갔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을 다른 모습으로 나눠주고 채워줬다. 


우리 가족은 지금 요상한 가족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 가족 각자에게 작은 틈을 만들었을 것이다. 처음엔 어둡고 깊은 틈이 너무 커 보여 슬프고 아팠다. 후회도 했다. 1년을 보내고 2년 차, 남편이 왔다간 이제야 작은 틈에 채워야 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가버렸지만 괜찮다. 다음번 우리가 다시 만날 땐 틈이 더 작아져 있을 것은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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