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는데, 그곳은 5일마다 장이 열렸다. 특별할 것 없는 평화로운 시골에서 5일장은 이벤트 같은 날이다. 아빠나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갔던 기억이 난다. 시장은 신세계였다. 어른이 된 지금도 시장에 가면 신기한 것들에 둘러싸여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어린아이의 눈엔 더 그랬을 것이다. 생활용품, 청소도구, 김치와 반찬들, 생선, 호미나 낫, 떡볶이, 호떡, 순대국밥은 기본이고 심지어 살아있는 닭과 강아지도 팔았다. 그곳은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도시로 이사를 하고 자라면서 시골 시장은 일 년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진정한 이벤트가 되었다. 도시에 살면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그곳의 시장을 꼭 들른다. 아직도 시장은 나에게, 그리고 이제는 나의 아이들에게도 신나는 장소이다.
뉴질랜드는 도시 같으면서 시골 같은 나라다. 뉴질랜드에서 제일 큰 도시인 오클랜드 시티 중심부는 높은 빌딩과 화려한 조명이 밤을 밝힌다. 그런데 딱 시티 중심부만 그렇다. 그곳을 제외하면 뉴질랜드는 낮과 밤의 경계가 확실하다. 그동안 나는 낮도 환하고 밤도 환한 곳에서 살았다는 걸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온전한 밤은 아니었던 것이다.
뉴질랜드는 해가 넘어가고 밤이 시작되면 커다란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말 그대로 정말 깜깜하다. 그리고 그 덕에 매일 밤 수백 개의 별을 볼 수 있다. 나는 서울에서 별을 본 적이 없다. 하늘에 반짝이고 있는 게 별인지, 아니면 위성인지, 비행기인지 궁금했던 적은 많았다. 별이 보고 싶어 일부러 천문대를 갔던 적도 있다. 이곳은 별을 위성이나 비행기로 의심하지 않는다. 제 위치에서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는 별을 보고 있으면 책에서 본 별자리가 문득 떠오른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도시에 살면서 잊었다가 뉴질랜드에 와서, 어른이 되어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요즘은 기존 주택을 허물고 타운하우스 형태의 주택을 짓고 있는 공사 현장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집들은 마당을 가지고 있는 주택이 많다. 주말이면 집 앞 잔디를 깎고 관리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게다가 겨울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이곳은 일 년 내내 초록 풍경이다. 또, 높은 빌딩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하늘이 넓게 보이고, 구름도 더 많이 본다. 나는 구름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처음인 것 같다. 손으로 빚어 만든 것 같이 폭신해 보이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그 위에서 팡팡 뛰며 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 기분 역시 내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고 느낀 그 감정과 비슷하다. 나는 지금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평화로운 그 시간을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밤에 별을 매일 볼 수 있는 점 말고 어린 시절 시골의 추억을 불러오는 경험이 또 있다. 바로 시장이다. 뉴질랜드엔 지역 곳곳에서 열리는 Market이 있다. 대게는 Farmers Market인 경우다. 직접 키운 농작물을 시장에서 파는 것이다. 채소와 과일, 꿀, 직접 만든 소시지나 음식이 주를 이룬다. 내가 사는 동네도 매주 일요일마다 넓은 주차장에 마켓이 열린다. 일요일에 열리기 때문에 Sunday Market이다. 처음 갔을 땐 얼마나 신이 나던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어렸을 때 놀러 갔던 시장을 다시 생각나게 했고, 한국의 시장과는 다른 물건과 음식들이 나를 더 즐겁게 했다. 일반 마트보다 더 싱싱한 채소나 과일을 더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카드 리더기를 가지고 있는 판매자도 있었지만 대게는 현금 결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Sunday Market에 갈 땐 큰 장바구니와 현금을 챙긴다.
이민자가 많은 뉴질랜드는 세계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매주 고정으로 참여하는 쌀국수 노점이 있는데, 일반 식당보다 양이 많아,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저녁까지 배가 부르다. 그 옆집은 양꼬치와 삼겹살, 소고기 꼬치를 팔고 그 옆엔 터키쉬딜라이트를 파는 상점, 그 옆은 인도 전통 간식을 파는 상점이 있다. 아! 붕어빵을 파는 가게도 있다. 한국에서 먹던 맛 그대로 한여름에도 붕어빵을 즐길 수 있다. 다양한 세계 간식으로 범위는 넓어졌지만 먹거리를 즐길 때마다 어린 시절에 시장에서 먹었던 떡볶이나 순대가 떠오른다. 아이들은 나중에 시장을 생각할 때 쌀국수나 양꼬치 구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요일은 유난히 화창한 늦가을 날씨였다. 뉴질랜드의 겨울이 대게 우중충하고 비가 많이 오는 것을 생각한다면, 보석 같은 날이었다. 자연히 우리는 장바구니 하나씩 챙겨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장에 갔다. 넓은 주차장과 공터를 이용해 열리는 마켓은 공터 공사 후 규모가 더 커졌다. 작년엔 많이 보이지 않았던 간식 트럭이 보였고 작은 소품을 파는 노점도 많아졌다. 내가 사는 오클랜드는 농업이 주된 지역은 아니기 때문에 아주 시골스러운 느낌은 아니지만 먹거리와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는 점은 같다. 매주 꿀을 가지고 나오는 분이 있는데 나는 언젠간 그 꿀을 꼭 먹어보고 싶다. 아직은 병에 아무 라벨도 붙어있지 않은 꿀이 선뜻 사 지지 않는다. 영어라도 잘하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구입을 할 텐데, 그마저도 어려우니 매일 눈으로 점찍어만 두고 마음속 장바구니에 매번 담아둔다.
Sunday Market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애용하는 가게는 채소와 과일을 파는 노점이다. 지난여름 3주 정도 빠짐없이 Sunday Market에 방문했었는데, 그 이유는 주먹만 한 자두 때문이었다. 한국의 자두와 다르게 크기도 크지만 무척 달았다. 자두 농장을 하는 노부부가 자두 수확철을 맞아 판매를 위해 마켓에 나온 것이다. 양손 무겁게 한가득 자두를 품에 안고 무척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먹고 싶어 씻지도 않고 3-4개를 먹으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물로 휘 휘 씻은 뒤 또 한 개를 베어 물었다. 내가 평생 먹은 자두 중 제일이었다. 여름이 지나고는 먹을 수 없게 됐지만 나는 내년 여름에 잊지 않고 마켓에 들러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자두뿐만이 아니라 채소나 과일의 가격이 일반 마트보다 저렴하다. Sunday Market에 고정으로 참여하고 있는 채소와 과일 노점이 몇 군데 있는데 갈 때마다 모두 들른다. 비슷하지만 노점마다 각기 다른 장점이 있다. A노점은 다양하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파는데 다른 곳보다 가격이 높다. 하지만 소량으로 판매를 하기 때문에 금방 품절이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다. B상점은 양으로 승부한다. 채소보다 과일의 가짓수가 많고 무더기로 쌓아놓고 판매를 하고 있다. 커다란 가방에 양껏 사과나 토마토를 담고 무게를 달아 계산한다. 이번주엔 사과와 귤을 가방 한가득 사 왔는데, 벌써 바닥이 보인다.
이번에 새로 생긴 가게 중 하나인 팝콘가게에서 큰 사이즈 팝콘 한 봉지를 10달러 주고 구입했다. 우리나라 환율로 8천 원 정도 하는데, 줄이 아주 길다. 팝콘을 파는 사람은 팝콘을 튀겨내고 소금과 설탕을 입히느라 정신이 없다. 처음엔 팝콘에 왜 이렇게 줄이 길까 하는 호기심에 사봤는데, 우리나라의 강냉이처럼 큰 옥수수 알갱이에 설탕과 소금을 입혀 고소하고, 달고, 짭조름한 게 맛있었다. 영화관에서 파는 팝콘과는 전혀 다른 모양과 맛이었고 먹어보니 줄이 긴 이유가 이해됐다. 우리의 최애 간식 중 하나인 양꼬치와 돼지고기 꼬치도 먹었다. 아이들은 커다란 솜사탕 앞에서 잠깐 흔들렸지만, 손에 든 꼬치와 다른 손에 든 팝콘 봉지로 위안 삼으며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주로 먹거리를 구입하는 편인데 빈티지 그릇이나 보석, 꽃, 옷등을 팔기도 한다. 그것들은 시장의 재미를 한껏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사실 구경하는 건 먹거리보다 이쪽이 더 재미있다. 크록스 신발에 붙이는 지비츠만 파는 노점도 있고 장식 마그네틱만 파는 곳도 있다. 직접 실로 만든 팔찌를 파는 사람, 나무를 깎아 조각을 만들어 파는 사람처럼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를 선보이는 사람도 많다. 새 바이올린을 사기 위해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꼬마아이도 매주 만난다. 새 바이올린을 사고 나면 더 큰 꿈으로 그 아이의 표지판이 바뀔 것이다. 시장은 어떤 이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쩌면 시장이 즐거운 이유는 그런 열정들이 모여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함께 꿈을 키워가는 공간인 것이다.
뉴질랜드의 평화로움이 가끔 지겨울 때가 있다. 이곳에서 매일 변하는 건 날씨뿐이다. 큰 사건도 사고도 없는 이곳은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다. 그래도 도시이면서도 시골인 이곳이 나에게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가끔은 신나는 일을 기대하지만, 나는 고요함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중년의 나이엔 자신을 돌아보는 조용한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누군가가 말했으니, 이 시간을 조금 더 소중히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고요한 이곳에도 정적을 깨는 것이 있으니, 아침 6시에 밖에서 울리는 새소리다. 어느 날은 정말 짜증이 날 정도로 시끄럽게 구는데, 창밖에서 부산스럽게 아침을 시작하는 그들의 바쁜 움직임을 보면 이내 웃음이 나오고 만다. 뉴질랜드에서는 나보다 새가 더 바쁘다.
이번 주말도 날씨 예보는 맑음이다. 시장에 가야겠다. 뉴질랜드에서도 Sunday Market은 이벤트 같은 날이다. 내가 어릴 때 아빠손 잡고 갔던 5일장처럼, 무료한 평화로움 속에 작은 즐거움을 주는 공간이 있어서 정말, 정말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