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뉴질랜드에 와있는 동안, 차를 렌트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옆 동네 마트에 틈날 때마다 갔다. 차로 10분 걸리는 거리다. 내가 버스를 이용해 이 마트를 가려면 40분이 걸린다. 그것도 한번 갈아타야 하는데 갈아탈 버스가 타이밍 좋게 도착했을 경우다. 차가 생긴 나는 신나게 이 동네 저 동네 마트를 답사했다. 전에도 가본 적이 있지만 내가 사는 동네보다 가격이 저렴하다. 같은 물건인데 왜 이렇게 가격 차이가 나는 건지, 차가 없는 나만 억울하다. 뉴질랜드는 차 없이 지내기 그리 좋은 나라는 아니다. 종합 쇼핑몰도 있지만, 이곳은 공구 상점, 식료품 마트, 일반 마트와 다르게 특색을 갖춘 식료품 마트, 꽃상점(대게 공구상점 옆에 붙어있다. 가드닝을 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나 장식품들을 같이 판다.), 술 상점, 정육점, 빵집 등이 넓은 땅에 자유롭게 펼쳐져 있다. 공구 상점 같은 경우는 규모가 진짜 커서 물건 구경만 몇 시간씩 할 수 있을 정도다. 이곳은 집이나 차를 직접 수리하고 고치고 가꾸며 사는 삶이 기본이다. 학교에서도 이와 관련된 수업이 있고, 과목을 선택해 배울 수 있다. 이렇게 구경하는 재마가 있는 상점들은 차를 이용해야 쉽게 갈 수 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모두 차가 있다. 나만 빼고.
아무튼, 나는 옆동네 마트에서 그린 바나나를 구입했다. 1Kg에 3.8ND정도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와있는 동안 집에 먹거리가 꽤 많았기 때문에 천천히 익혀먹을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러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 바나나를 구입한 지 10일이 지났는데 그 바나나는 아직도 초록색이다. 껍질을 까봤는데 단단한 몸체에 아주 찰싹 붙어있는 껍질은 벗겨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을 때, 큰 애가 옆에서 말했다.
"엄마, 그거 구워 먹어야 돼."
뭐라고? 요리를 즐기지 않는 나는 뉴질랜드 어느 집에나 기본 옵션으로 구비되어 있는 오븐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3.8ND의 바나나를 먹기 위해서 오븐을 돌려야 하다니. 게다가 오븐의 크기가 꽤 크기 때문에 사용하고 난 뒤 트레이 세척이 매우 귀찮다. 뉴질랜드의 주방은 작은 싱크볼에 식기 세척기가 국룰인 것인지(아마 내가 3명이 지낼만한 작은 집들만 살아봐서일 것이다. 큰 집은 싱크볼도 크겠지), 한국에서 넓은 싱크볼을 사용했던 나는 아주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세명의 설거지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그 어중간함의 어디쯤이라, 좁은 싱크볼을 이용해 설거지하기도, 식기 세척기를 2시간 돌리기도 애매하다.
그린 바나나처럼 뉴질랜드엔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식재료들이 꽤 있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니 아주 즐겁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몹쓸 귀차니즘이나, 레시피가 너무 복잡해해 결국 먹지 못하고 버려지는 일도 있고, 내 마음대로 새로운 요리법으로 재탄생한 재료도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뉴질랜드에 온 첫해인 작년, 나는 과일 채소를 집으로 일주일에 한 번 배달해 주는 Wonky Box를 이용했다. Wonky Box는 제철 과일과 채소를 랜덤으로 박스에 담아 매주 일정 요일 집 앞으로 배송해 주는 업체다. 신선하고 생산자가 확실해 믿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재료를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모양이 예쁘지 않은 당근이 올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단점도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사다 보면 나에게 익숙한 것들에 손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매주 도착한 박스를 열 때마다 보물 상자를 여는 느낌이었다. 농장과 직접 거래하기 때문에 못생긴 생김새들도 종종 있었지만, 생긴 건 먹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버려지지 않고 소비자에게까지 유통될 수 있다는 점이 더 좋았다. 그리고 Wonky box는 못생긴 당근에 눈을 붙여 소비자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는 광고를 하고 있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그 당근을 보고 서비스를 신청할 것이다. 그렇게 동정심에 이끌려 시작한 Wonky box엔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새로운 채소도, 못생김도 아닌, 내 게으름이었다.
나의 Wonky Box 시도의 목적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뉴질랜드에 왔으니 뉴질랜드에서 나고 자라는 것들을 먹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생전 처음 보는 여러 가지 모양의 채소들을 배송받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나는 그 채소의 이름을 찾고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를 공부해 실천에 옮겨야 했다. 어느 날은 레시피대로 새롭게 해 먹었고, 어느 날은 한국식으로 재해석해서 먹었고, 어느 날은 새로운 채소를 그대로 뒀다. 그다음 날도 이 채소는 선택되지 않았고, 그다음 주까지 그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결국 흐물흐물 물러져 버려졌다. 가끔 향이 강하고 맛이 독특한 채소도 왔는데, 레시피를 찾아보면 죽이나 빵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는 재료였다. 나는 죽이나 빵을 잘 만들지 않는다. 그 채소 한 개를 소비하기 위해 밀가루와 그 외 부수적인 재료들을 더 구입해야 했다. 그래서 어느 것은 잘 먹었고, 어느 것은 버려졌다. 버려진 것 중 어떤 건 마트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중적인 재료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친근해진 재료가 있는데, 그건 바로 리크(Leek)다.
한국인이 많이 사용하는 음식 재료 중 마늘과 파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뉴질랜드 마트에서 마늘 두 알을 담아 판매하는 걸 보고 웃은 적이 있다. 그래도 다행히 다진 마늘도 팔고 통마늘도 판매되고 있는데, 다진 마늘은 이상하게 시큼한 맛이 나서 한국에서 한 번도 구입해 본 적 없는 통마늘을 사 껍질을 까고 그때그때 으깨서 사용하고 있다. 세상에,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라실까. 엄마와 언젠가 다진 마늘을 파는데 굳이 껍질을 까야하는 통마늘을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뉴질랜드에 와서 마늘을 사용할 때만큼은 엄마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됐다. 마늘은 이렇게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는데 대파는 돌파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뉴질랜드는 한국 대파 굵기의 1/4 정도 되는 얇은 파를 3-4개 묶어서 2-3달러에 판다. 작년엔 텃밭이 있어서 파를 심어 보기도 했는데, 얇은 두께가 아무리 많이 수확해도 충분한 양이되지 않았다.
한국과 비교하면 당연히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얇은 파에 손 이 가지 않았다. Wonky box가 나에게 배달해 준 리크는 종종 대파 대용으로 내가 요리 이곳저곳에 활용하고 있는 채소 중 하나다. 리크는 사실 모양만 파처럼 생겼다. 알싸한 맛도 없고 파가 내는 향도 없다. 음식에 곁들였을 때 잡내를 잡아주거나 풍미를 더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마음의 위안인 건지, 나는 리크를 된장찌개에 넣는다. 파처럼 송송 다져서 넣는 게 아니고 큼직하게 잘라서 넣는다. 파가 된장찌개에 곁들여지는 재료라면, 리크는 메인이다. 즉, 리크 된장찌개인 것이다. 아이들은 된장찌개에 들어간 리크보다 삼겹살 구울 때 같이 구운 리크를 더 좋아한다. 담백하고 씹는 재미가 있는 리크와 돼지기름은 환상의 조합이다.
브로콜리니(broccolini)도 내가 종종 구입하는 새로운 재료다. 브로콜리니는 브로콜리의 사촌인데, 모습은 전혀 다르다. 브로콜리가 큰 덩어리 같은 느낌이라면, 브로콜리니는 길쭉한 줄기 끝에 작은 브로콜리가 꽃같이 핀 모습이다. 브로콜리만큼 영양적으로도 만점이다. 그리고 가늘고 길어 쉽게 익고 다양한 요리에 첨가할 수 있다. 대게 구워 먹거나 샐러드에 생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처음 마트에서 브로콜리니를 보고 나는 만두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단단한 줄기가 좋은 식감을 줄 것 같았고 영양도 풍부할 테니 일석이조다. 그리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만두 마니아인 나는 요리똥손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직접 만두를 만드는데, 그 이유는 단지 손만두가 먹고 싶어서다. 게으름을 물리치고 기꺼이 수고를 겪는 몇 안 되는 활동 중 하나가 만두 만들기다. 한국에서 만두를 만들 땐 두부, 김치, 고기, 부추, 숙주, 당면등을 넣었다. 뉴질랜드에 오고 만두가 먹고 싶은 욕구가 꽉 찼을 때, 마트에 가서 부추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이미 마트 홈페이지에서 부추를 파는 것을 확인하고 갔다.) 직원은 나를 민트와 바질 화분을 파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화분에 심어진 몇 가닥의 부추화분을 보여줬다. 이것밖에 없냐고 하니 말린 부추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간 곳은 향신료 코너다. 말린 부추가 5cm 정도의 작은 향신료통에 넣어져 있었다. (아마 중국마트엔 부추를 팔지도 모르겠다.) 꽤 당황했지만 바로 계획을 변경했다. 뉴질랜드에서는 한국 만두가 아니고 뉴질랜드 만두를 만들어야겠구나! 그렇게 고른 재료 중 하나가 브로콜리니다. 내 예상대로 아삭거리는 식감이 만두와 잘 어울렸다. 만두는 뭘로 만들어도 맛있으니, 앞으로도 뉴질랜드에 있는 재료들을 이것저것 넣어서 만들어보려고 한다. 그래도 김치는 꼭 들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Wonky Box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얼룩 감자다. 뉴질랜드엔 주식 중 하나인 감자의 종류가 무척 많다. 아마 각 감자의 단단함과 맛의 차이, 그리고 요리 방식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직 감자 구분을 잘 못하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요리에 그냥 접목시킨다. 얼룩 감자는 단단함이 덜해 식감이 부드러웠던 것 같다. 나는 감자조림을 했다. 맛있었다.
반면, 과일은 무난히 모두 소비가 됐다. 처음 보는 빨간 배도 맛있게 먹었고, 귤인지, 오렌지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큰 건 엄청 크고 작은 건 엄청 작은 감귤류도 많이 먹었다. 레드 키위, 옐로 키위, 그린 키위는 말할 것도 없다. 제철마다 바뀌는 여러 가지 과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색도 이쁜 과일은 대게 모양도 예뻤다. 채소보다 접근이 쉬웠고 자연히 소비도 더 많았다. 하지만 과일에도 문제는 있었다. 계절이 가을을 지나 겨울로 넘어가면서 매주 박스에 레몬이 3-4개씩 들어있었다. 겨울이 레몬 수확철인 게 틀림없다. 어느 건 주먹보다 더 컸고 어느 건 아주 작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겨울 동안 레몬이 점점 쌓여가면서 내 마음의 압박도 커져갔다는 것이다. 저걸 어떻게 소비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내가 좋아하는 레몬 파운드케이크를 만들려고 틀을 샀는데, 레시피를 보니 레몬이 얼마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 케이크 한 개에 한 개도 안 쓰였던 것 같다. 나는 이 고민을 끝내기 위해 제일 쉬운 선택을 했다. 레몬청을 만들자! 유리병 3개에 가득 눌러 담은 레몬은 다행히 맛있게 완성했고, 앞집에 한 개를 선물하고 두 개를 겨울 내내 아이들과 잘 먹었다.
뉴질랜드가 좋아진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사과다. 사과를 과일 중에 제일 사랑하는 나는, 뉴질랜드의 길고 우중충하고 추운 겨울을 사과를 먹으며 이겨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사과는 크고 예쁜 것이 상풍가치가 있을 텐데, 이곳은 아기 주먹만 한 사과부터 우리나라처럼 큰 사과까지, 다양하다. 아기 주먹만 한 사과를 처음 봤을 때, 장식용인가 하고 생각했다. 작은 사과는 도시락 싸기에 좋다. 사과 한 알이 도시락통에 쏙 들어간다. 한국에서는 상품가치가 없어 재배되지 않았거나 버려졌을 것이다. 큰 사과는 큰 사과대로, 작은 사과는 작은 사과대로 다 쓰임새가 있다.
사과는 종류가 무척 많은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는 Rose다. 장미처럼 분홍빛을 띤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이 품종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신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달큼한 맛의 이 사과가 입에 맞았다. 가을부터 사과 가격이 내려가면서 마트 진열장에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과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 사과만 장바구니로 가득 담아 온다. 뉴질랜드도 물가가 비싼 편인데 제철을 만난 과일은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다. 이곳도 겨울에 과일과 채소가격이 오르는데, 사과만 값이 내려간다. (토마토가 1KG에 여름엔 4-5ND 선이라면, 겨울엔 10-12ND로 오른다.) 사과를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다!(오늘 마트 사과 가격은 1KG에 3.49ND이다. 오예!)
뉴질랜드의 색다른 점 하나는 과일이나 채소를 무게를 달아 가격을 매기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1개가 필요하면 1개만 사면된다. 무게로 가격을 매기기 때문에 따로 포장되어 있지 않고 마음에 드는 과일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으면 된다. 마트에서 비닐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얇은 종이봉투가 비치되어 있는데, 처음엔 이 봉투를 활용하다가 요즘엔 이것마저 이용하지 않는다. 그냥 장바구니에 사과를 담는다. 브로콜리나 당근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비닐이나 종이봉투에 담지 않고 맨살(?)인 채로 장바구니에 담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어차피 집에 오면 비닐이나 종이봉투를 버리게 되는데, 그곳에 담아 오는 것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됐다. 장바구니에 맨 얼굴로 빼꼼히 자리 잡은 과일이나 채소가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한국과 뉴질랜드의 다른 점을 많이 본다. 생활이나 먹는 음식, 사람들의 인식, 풍경, 사실 어떻게 보면 모든 점이 다 다를 수도 있다. 처음엔 다름이 어색함으로, 불편함으로 다가왔는데 지금은 다름을 응용하고 이해하며 배울 점을 많이 느낀다. 구할 수 없는 한국의 식재료와 새로운 채소와 식재료들은 처음엔 스트레스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어차피 요리똥손이니 내 마음대로 하자!라는 용기와 더불어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줬다. 앞으로 뉴질랜드에 사는 동안 새로운 식재료를 계속 도전해보려고 한다. 한국의 음식과 뉴질랜드의 식재료가 어우러져 근사한 음식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 난 한국에 돌아가 한국 x 뉴질랜드 식당을 열어 돈을 많이 벌 수 있
아참, 그린 바나나는 아직도 오븐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서서히 노란빛이 나오고 있다. 꼭지는 메말라 비틀어졌지만 오늘내일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구입한 지 20일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