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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Jul 28. 2022

"사랑해요"

나를 안아주는 말



오래전 그림책 수업에서 만난 몇몇과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책을 정해 함께 읽고 일주일에 한 번씩 카카오톡 단체 채팅 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만남이 해를 거듭해 이어지다 보니 오랜 친구 못지않게 도타운 사이가 되었다. 모임을 통해 책이라는 공통 관심사에 대한 취향과 선호를 나누면서 서로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가장 먼저 전해 듣는다.



그런데도 사는 곳이 멀고 각자 삶의 리듬이 달라 (코로나의 여파도 있고) 직접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 사이 한 멤버는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그 친구가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루기만 했던 만남을 계획했다. 약속할 때만 해도 멀게만 느껴졌는데, 어느새 그날이 되었다.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그동안 쌓였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국 직전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마음을 졸였던 친구는 격리 중 아는 분이 옷과 음식을 가져다준 일을 알려 주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푸짐한 선물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그때 들은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분은 고마운 마음을 자신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도 그렇게 조건 없이 받은 마음이 있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단다. 그 마음을 언젠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내어주면 된다고. 그분을 모르지만 마음의 깊이만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선물이 부담일 때가 있다. 준 것에 대해 돌려받는 일, 받은 것에 대해 적절히 돌려줘야 할 일을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선물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될 수 있다. 선물이 고정된 둘 사이에서만 오간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말이다. 두 사람을 넘어 다른 이에게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줄 때는 주는 기쁨만을, 받을 때는 받는 고마움만 순수하게 껴안을 수 있을 것 같다.  



살다 보니 모든 관계에서 동일하게 마음이 오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사이에서는 이상하게 받기만 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신기하게 주고만 싶었다. 누군가에게 그저 주기만 할 수 있는 건 어떤 이에게서는 계산 없이 받기만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넉넉하게 베풀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어쩌면 그들도 이런 걸 바라 내게 주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당신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필요한 누군가에게로 그 마음을 흐르게 하라고. 그렇게 흘러 더 풍성해지는 선물이 되라고. 



선물은 고정된 관계 안에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걸 다양한 관계를 통해 배웠다. 받는 일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주는 일을 아까워할 필요가 없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받고 여건이 될 때 보답할 수 있으면 된다.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을 받았던 고마움과 기쁨을 품고 있다 다른 이에게 다시 건네줄 수 있으면 된다. 선하고 좋은 마음이 흐르고 흘러 멈추지 않는 물결이 된다고 믿게 되었다. 



친구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는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쓰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마음을.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일은 보상이 없어도 순전하게 즐겁다. 그 기쁨으로 내어 준 마음은 다시 채워진다. 살아가는 내내 좋아하는 마음을 키우고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때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60세가 되어 나간 동창 모임에서 알게 된 거라던 이야기. 그건 누구의 삶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과 60이 된 친구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사랑해’라는 말을 아낌없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랑해’라는 말은 많이 할수록 사랑을 자라게 한다는 걸, 살아있는 한 더 많이 해야 하는 말이라는 걸 60세의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일화의 주인공은 예전에 ‘사랑해’라는 말이 닳기라도 하듯 가슴에 품고 말하지 못했던 걸 후회했다. 



마음을 내어주고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을 닳게 하거나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다. 사랑이 없을 때 마음은 얼마나 시무룩해지는지. 반대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할 때 마음은 저절로 생기를 만들어 낸다. 그 생기가 내게 기쁨이라는 선물을 준다. 어딘가에 정성을 들이고 관심을 기울일 때, 기쁨은 나를 빠져나가 어딘가로 가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을 불려 이곳과 저곳에 행복을 심는다. 기쁨을 자라게 하는 사랑은 이곳과 저곳을 오가며 더욱 풍성해진다.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_김연수 <청춘의 말들>



사라질 테니 괜한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마음은 변하고 대상은 사라지거나 바뀌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사라지고 변하기 때문에, 바로 지금, 이 순간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낌없는 사랑만이 사라진 후의 쓸쓸한 자리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을 자라게 하고, 지금의 사랑만이 다음의 사랑을 예비하는 씨앗이 된다. 우리는 사랑으로 오늘을 내일로 연결하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사랑한다의 다른 말일 테니까.  



“사랑해요.”

우리는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헤어졌다. 그때 사랑한다는 말은 연인들의 비밀스럽고 은밀한 언어가 아니었고 달아날까 조심스러워 안달하는 마음도 아니었다. 말할수록 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 지는 말, 당신에게 보낼수록 메아리가 되어 내게 돌아오는 넉넉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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