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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Aug 20. 2022

오늘은 엄마가 너무 좋아!

나를 안아주는 말


유난히 비가 많은 여름이었다. 연일 비 소식이 이어졌고 폭우가 쏟아졌다. 비 걱정을 하는 사이 더워야 할 여름이 지나갔다. 어느새 입추가 지났고 처서를 앞두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모처럼 해가 든 파란 하늘이 유난히 높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가 맥없이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날. “공원 가자!” 목소리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높은 하늘이 맑고 파랬다. 어디서 몰려나왔는지 잠자리 떼가 낮은 비행을 하며 잔디밭 위 허공을 촘촘하게 메웠다. 멀리서 들리는 매미 울음은 한풀 꺾여 있고, 아이들 몇몇이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다녔다. 계절이 모퉁이에 다다랐구나. 여름은 얼마 남지 않았고 가을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고 있다.  



대기에 얇은 베일을 씌운 듯 저녁의 빛이 은은하게 떨어졌고 하늘 위로 둥실 뜬 구름이 바람에 훌훌 풀어졌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저녁 풍경에 이런 생각이 흘러들었다. 삶에서 비관할 일은 아무것도 없겠구나. 때가 되면 계절은 바뀌고 아이들은 언제나 즐거우니. 비가 내리다가도 바스락거리는 해가 들기 마련이고 더위에 지글거리던 대지도 가을 실은 바람 한 점에 성미를 죽인다.  



가만히 서서 한껏 먼 곳으로 시선을 보내는 사이 딸아이는 비눗방울을 만든다고 혼자 자리를 맴돌았다. 둥실 떠가는 비눗방울을 부질없이 쫓기도 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소리도 없이 잔잔하게 기쁨이 번졌다. 지금 여기서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내게 없는 것이나 누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지나가는 삶이 아깝다고. 보석 같은 삶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발 밑에 있는 것을. 손 닿지 않는 아득한 곳을 향하느라 손안에 있는 귀한 것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쥐고 있는 것, 작지만 단단한 기쁨에 열심히 눈 맞추고 싶어졌다.  



그날은 오랜만에 잔디밭을 거닐고 놀이터에 들러 신나게 뛰어놀았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남편까지 합류해 땀을 흠뻑 쏟을 때까지 이어 달리기를 했고. 지칠 만도 한데 달리는 재미에 빠져 아이는 거푸 온 힘을 다해 뛰어나갔다. 그런 아이의 뒷모습이 열렬해 괜히 뭉클했고. 아이가 도착하는 지점에서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있다 달려오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자 아이의 얼굴에 맺힌 땀이 살갗에 닿았다. 끈적하고 뜨끈한 아이의 몸이 발산하는 생명력, 삶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에너지로 내 품을 채웠다.  



마음껏 놀았는지 아이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즐거웠고 안아 달라는 어리광에도 주저하지 않고 팔을 내밀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집에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드는 길에도, "안아줘"라는 아이의 말이 달콤한 주문처럼 귀를 간지럽혔다. 딱 맞춘 듯 품 안에 포개지는 아이의 몸은 내게도 가장 포근한 선물이니까. 아이를 안아주고 쓸어 주는 일은 나를 안아주고 쓸어 주는 일이 된다.



“오늘은 엄마가 너무 좋아!”

내 마음을 아이가 읽은 걸까. 사랑한다고 몇 번을 말해주고, 몇 번을 되물어야 간신히 마음을 고백하는 깍쟁이가 느닷없이 이렇게 외쳤다.  

“엄마도, 서윤이가 너무 좋아.”

보잘것없는 이 작은 고백을 고이 접어 마음에 간직했다. 그 말에 담긴 아이의 마음이 선명하게 보일 것 같아서.  



아이를 통제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놀게 허용했을 뿐 그날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육적 놀이를 하겠다고 괜한 머리를 쓰지 않고 건강을 생각한다고 힘주어 요리하지 않았다. 좋은 생활 습관을 길러주겠다고 정리해라, 씻어라,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았고. 그래서 힘들지 않았고 피곤하다 얼굴 찌푸릴 일도 없었다.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너는 그런 내가 너무 좋다고 하니, 너에게 필요한 건 무얼 해주려고 애쓰느라 피곤한 엄마가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더라도 웃으며 너를 안아주는 엄마인가 보다. 무엇도 바라지 않아 무엇을 억지로 하지 않고, 온전하게 사랑만 담아 너를 바라봐 주는 엄마. 아이는 그런 엄마를 원하고 사랑하는가 보다.



열심히 노는 아이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고 잘 노는 것만이 주어진 역할의 전부인 아이는 그 역할에 충실했고, 그런 아이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던 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자기 자신이 되었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이 되려고 애쓰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편안하고 익숙한 모습 그대로 서로를 가장 잘 사랑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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