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기보다 빼기가 어려운 법

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by 춤추는바람

스튜디오를 시작하고 반년이 지났지만 수익은 나지 않았다. 클래스를 찾는 사람은 고만고만했고 매달 월세 날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장’이 되면 자유롭게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외롭고 괴롭고 무거운 자리가 없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돈이 벌리지 않으니 무언가 부족한 게 아닐까 고민은 계속되었다. 무얼 보태야 하나, 무얼 더해야 하나, 더하기에만 열중했다.


한 번은 윤형근이라는 화가의 전시를 다녀왔다. 단색으로 화폭을 채우거나 여백을 살린 그림도 좋았지만 화가가 평소에 지속해왔던 기록이 주는 울림이 컸다. 꾸준히 쓴 일기와 인터뷰 등에서 작가의 가치관과 삶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작업에 임하는 자세는 한결같이 성실하고 진중했다. 예술에 대한 자세 또한 담백하고 진실했다.


하나의 분명한 선을 긋기 위해, 먹의 농담과 번지는 정도를 예측하기 위해, 화가는 연습을 반복했다. 단순해 보이는 검은 선이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기까지 무수한 시간이 쌓였다. 화가는 “예술은 심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매일 반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시간이 쌓여 그림에 깊이가 생기고 아우라가 형성되었다. 어떤 일이 깊이를 갖기 위해서는 꾸준함이 필수다. 단순한 일일지라도 시간이 쌓이면 차원이 달라진다.


화가의 인터뷰가 담긴 동영상을 보며 내 일에 대해 생각했다.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보겠다고 고심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상심한 상태였다. 그래서 조금 막막했었다. 그런데 화가의 말을 듣다 보니 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해오던 걸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메뉴로 수업을 반복하면서 그 안에 깊이와 힘을 쌓는 것. 변화만이 성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반복 속에도 힘이 있다. 어쩌면 거기서 더 단단한 성장이 자라는지도 모른다.


다른 유명 디저트 샵이나 클래스에서 신 메뉴를 선보이면 느린산책에서도 눈길을 끌 만한 디저트를 선보여야 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디저트, 다른 데는 없는 메뉴에 열광했다. SNS에 달리는 ‘좋아요’의 개수는 자릿수부터 확연히 달랐다. 내게도 그런 실력이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 대중의 눈을 사로잡고 관심을 끌고 싶었다. 클래스 스케줄이 공지되면 단번에 마감이 되는 인기 스튜디오로 알려지길 바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디저트는 내가 즐기는 것과 달랐다. 사람들은 첫눈에 관심을 사로잡는 디저트를 원했다. 맛보다는 외형을 중시하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사진만 잘 찍히면 된다는 식이기도 했다. 겉에 보이는 부분을 강조하려면 인위적인 장식이 필요하다. 있는 그대로의 재료보다 설탕이나 가공품으로 꾸며야 한다. 그런 장식은 자연스러운 단맛과 좋은 재료로 건강한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는 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지향점을 포기하고 대중의 입맛을 맞추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당시 마카롱의 열풍에 이어 ‘뚱카롱’이 유행했다. 클래식한 마카롱보다 크기도 크고 꼬끄 사이에 2cm가 넘는 두꺼운 필링을 채운 디저트다. 과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뚱카롱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게 유행하니 한 번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누군가 조언을 해왔다. 단번에 거절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내가 만드는 디저트는 우리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 것을 전제로 했다. 내 아이에게 엄청난 설탕과 버터, 크림이 뒤범벅된 ‘뚱카롱’ 따위를 먹이고 싶진 않았다.


메뉴를 바꾸는 게 당장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유명 베이킹 클래스에도 기본 커리큘럼은 고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새로운 메뉴를 추가하는 식이었다. 오픈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스튜디오라면 수시로 메뉴를 바꾸는 것보다 시그니처 메뉴를 만드는 게 급선무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지속하면서 내공을 쌓는 게 더 중요했다. ‘구움 과자가 맛있고 수제 쿠키가 맛있는 집’이라는 이미지를 탄탄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윤형근의 그림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선 위에 또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색을 쌓는 인고의 시간을 담고 있다. 우연한 번짐의 효과나 일필휘지의 농담이 그 목적이 아니다. 고집스러운 반복과 치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한 정교함이 그 속에 숨어 있다. 하나의 거대한 선만 남기게 될 때까지, 또는 하나의 색으로 거대한 화폭을 뒤덮게 될 때까지, 화가는 끊임없이 덜어내고 비워냈을 것이다. 불필요한 꾸밈과 수식의 요소를 싹 빼 버리고 정수만을 남긴 그림은 그렇게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림 앞에서 내 생활과 일을 되돌아보았다.


정수만을 남기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긴 시간 연습하고 고민했을까. 그렇게 헤아려보자 기본만 남길 수 있는 과감함이야말로 탄탄하게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생활과 일도 그랬으면 했다. 불필요한 욕심과 잡다한 일을 버리고 중요한 것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관심과 유행에 흔들리지 말고 나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흩어지려는 에너지를 한데 모아 단단하게 완성시킨 기본만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느린산책의 디저트가 가야 할 방향이 명확해졌다.









‘알함브라’라는 이름이 붙은 케이크 실습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케이크를 만들고 윗면에 녹인 초콜릿으로 ‘Alhambra’라고 영문 글자를 써서 마무리하는 실습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초콜릿의 속도를 따라 빠르게 글자를 써 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초콜릿이 흘러내리는 속도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초콜릿이 담긴 짤주머니를 쥔 손에서 힘을 빼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손의 힘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다. 멋진 필체로 시작된 글자가 불안정해지더니 마지막 ‘a’의 둥그런 부분이 찌그러지고 말았다.


“’a’는 왜 이렇지?”
평가를 위해 케이크를 살펴보던 셰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속도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대답에 셰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모든 글자가 엇비슷하게 못났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앞선 글자들은 당당하게 제 멋을 표현하고 있는데 마지막 두 어 글자는 눈에 띄게 크기가 작아지고 급기야 뭉개졌으니 말이다. 잘하고 싶은 욕심에 한 번에 끝내려고만 했다. 마음은 잔뜩 긴장했고 손은 힘만 가득 들어가 있었다. 한 톨의 여유도 없었다.

매달 메뉴를 바꾸고 이것저것 메뉴를 늘리고 있던 상황도 그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잘하고 싶은 욕심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느라 ‘a’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한 번 쓰고 말 재료와 포장재를 구입하느라 불필요한 지출은 늘어났다. 좋은 재료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재료비는 아끼지 않았고 필요한 건 계획 없이 구입했다. 짜임새 있게 예산을 운용하지 못해서인지 지속적으로 월세에 허덕거렸다. 더하기보다 빼기가 중요하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다 잘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그러니 빼기가 힘들었다.


‘예술은 심심한 것’이라고 화가는 말했다. 불필요한 것을 빼서 심심해진 것, 그래서 매일 반복할 수 있는 게 일이고 예술이었다. 반복이 결국 실력이 된다. 그 역설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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