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안나 마리아 고치 글,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 박서영 옮김, 오후의 소묘, 2019)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귀여운 할머니가 등장한다. 한적한 강가에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는 때가 되어도 오지 않는 사신을 생각하며 나를 잊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자루를 뒤집어쓴 사신이 드디어 찾아온다.
때마침 스폰가타*에 들어갈 속을 만들고 있던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빵을 완성할 생각에 여념이 없다. 할머니는 스폰가타에 들어갈 소를 졸이고, 팡도르 반죽을 만들며 말랑한 누가로 변신할 머랭을 굳히느라 하루 이틀, 사신의 부름을 뒤로 미룬다. 그러는 사이 사신 또한 할머니의 집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 부지불식간에 입으로 떠먹여 지는 과일 소와 빵 반죽의 맛에 반해 자신의 임무를 잊어버린다. 크리스마스 빵을 만드느라 분주한 할머니의 마음과 완성된 빵을 기대하는 사신의 설렘 속에서 그림책은 계속 궁금증을 자아낸다. 빵은 완성될 수 있을까. 사신은 할머니를 데려가는 임무를 과연 완수할까.
죽음에 임박해서도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디저트는 아니더라도 한 해가 지나고 새해를 맞을 때면 꼭 만들고 싶어 지는 디저트가 있다. 바로 갈레트 데 루아다. 갈레트 데 루아는 ‘왕의 갈레트’라는 뜻으로 주현절(1월 6일, 예수가 30세가 되던 해에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나타난 것을 기리는 종교 축일)을 기념하여 만들어 먹는 프랑스의 축제 음식이다. 밀가루 반죽 사이에 버터를 넣고 여러 번 밀어 펴는 과정을 반복하여 촘촘하게 결이 생기도록 굽는 파이로 안에는 버터와 아몬드 가루로 만든 다양한 크림이 들어간다. 페브라 불리는 도자기 인형을 넣어 한해의 운을 점쳐 보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인형이 들어 있는 파이 조각을 고른 사람은 그 날의 왕이 되는 행운을 누린다.
갈레트 데 루아는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파이가 아니다. 밀가루 반죽 사이에 버터를 넣고 접고 밀어 펴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냉장고에 넣어 충분히 휴지 시켜줘야 한다. 밀어 펴는 사이 탄성이 생겨 그냥 구우면 뜨거운 열에 모양이 찌그러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실온에 두면 반죽 속의 버터가 녹아 겹겹이 쌓인 파이의 결이 하나로 들러붙을 수 있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고 둥그런 모양을 예쁘게 간직한 파이의 비결은 기다림 속에 있다. 여기서 기다림은 지루하게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상상으로 설렘을 만드는 시간이다. 손이 밀대와 함께 반죽에 머무는 횟수만큼 파이의 결은 두꺼워진다. 반죽끼리 들러붙지 않게 적당한 힘을 실어 정성껏 매만지는 사이 반죽은 사랑스러운 무언가가 되고 마음은 오븐에서 파이가 구워질 순간을 고대하게 된다.
『할머니의 팡도르』 속에서 이야기를 맛깔나게 이끌어가는 것은 달콤한 빵을 기대하는 사신의 마음과 크리스마스 빵을 완성하고자 하는 할머니의 열정이다. 사신은 할머니가 만드는 소에서 피어오른 달콤한 연기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스폰가타를 기대하며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생기가 돈다. 과일 소와 빵, 오븐에 구운 아몬드를 사신의 입에 넣어 주고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할머니의 얇은 입술에는 미소가 번진다. 책에서 읽은 즐거움과 설렘은 갈레트를 만들 때의 감정과 무척 닮아 있다. 올해는 그냥 넘어갈까 했던 갈레트를 기어이 만들게 한 건 이 책이다. ‘아름다운 맛’의 비법은 오직 기다리는 일이라는 할머니의 말처럼,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는 갈레트의 비밀 또한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오븐을 열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고소한 열매 냄새로 텅 비어 있던 사신의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듯 갈레트를 굽는 동안 파이의 결이 하나씩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이 마음은 둥실 떠올랐다. 갈레트를 꺼내기 위해 오븐을 열자 뜨거운 김에 실려 아몬드 크림과 버터의 향이 쏟아져 나왔다. 촘촘히 살아난 결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갈레트를 보며 “올해는 운수가 대통하겠는 걸!”하고 외친 건 빈말이 아니었다. 매해 의식처럼 거듭되는 일은 모르는 사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차곡차곡 정직하게 쌓여 마침내 부풀어 오른 파이의 결처럼 새해의 날들이 부지런하게 쌓여 무언가가 만들어지길. 잘 구워진 갈레트를 보며 새해의 날들을 점쳐보았다.
빨간 스카프를 두른 귀여운 할머니와 검은 자루의 형상을 한 사신의 이야기는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그리고 죽음 이후 남겨지는 것의 의미를 되묻기도 한다. 할머니가 마지막 찰다* 속에 숨겨놓은 비밀 레시피는 아이들 손에 전해져 누군가의 삶을 이끌어주는 인생 레시피가 될 것이다. 할머니는 사신을 따라 강을 건너 떠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남긴 레시피를 우연히 발견한 아이가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면서 찰다는 나누어지고 이야기는 새롭게 이어질 테니까.
“아이에게 귤을 까줄 때, 사신의 텅 빈 두 눈이 붉어졌어요. 그리고 작은 물방울 하나가 숄 위에 떨어지며 반짝였지요. 그것은 찰나였어요.”
『할머니의 팡도르』
작은 과자가 건네는 위안과 기쁨을 안다. 딸기 케이크를 만들 거라고 하면 다섯 살 딸아이는 두 눈을 반짝거리고, 산딸기 쿠기를 만들 거라고 하면 남편이 ‘오호!’하며 기대한다. 누군가에겐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지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 나만의 레시피가 착착 쌓여가고 있다. 이 레시피를 사람들과 나눈다. 누군가에게 나만의 레시피가 되어 다정한 기운을 퍼뜨려 주길 바라면서. 할머니의 찰다처럼 나누어 줄수록 풍성하게 의미를 만들어 가길 꿈꾼다.
잘 부풀어 오른 갈레트를 가족들과 나누어 먹으며 오가는 웃음 속에서 서로의 건강을 기원했다. 말하지 않아도 갈레트 속에 담긴 달콤한 온기가 그 일을 했을 것이다. 죽음을 미루면서까지 할머니가 만들고 싶어 했던 과자의 의미를 그렇게 헤아려본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찰다 속에 감추어둔 인생 레시피는 내가 찾아낸 것 같다.
*팡도르 : 판도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빵
*스폰가타 : 말린 과일, 견과류, 꿀 등으로 만든 속을 첨가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케이크
*찰다: 이탈리아의 디저트용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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