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말
우연이 빛을 드리우는 순간을 사랑한다. 이제는 커다란 성취나 예정대로 펼쳐지는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알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자잘한 만남과 발견, 배움이 내일을 기다리게 한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작은 정원이나 맛있는 빵집, 오래된 서점과 시선이 머무는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걸음을 멈춰 세우는 순간이 있어 삶을 희망한다.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은 우연이 드리우는 빛을 향해 자란다.
순전히 우연히, 누군가의 사랑을 연결해주는 오작교가 되었다. 그것도 책을 통해. 내게 그런 일이 생길 줄은 알 수도 없었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 권의 책이 내게 왔고, 책을 통해 작가의 삶을 읽었다. 그의 삶에 내 삶을 연결해 글을 썼고, 우연처럼 저자의 아버지와 닿았다. 그 연결의 마지막 고리는 당연히 나의 아버지. 하지만 거기에 또 어떤 고리가 연결될지 알 수 없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이어갈지 모른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만나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살아가고 쓰여지는 한 누군가를 만나고 이어질 것이다.
김해서 작가의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라는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썼다. 거기에 모르는 이웃이 댓글을 달아 주었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책을 받아 들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목이 메어서 아팠답니다… 답장이 없는 편지에 스스로 답을 내릴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했던 순간들이 가슴을 에이게 하네요.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꾸벅)”
처음 보는 아이디를 클릭해 그의 블로그로 들어갔다. 자신의 딸이 낸 책이라는 글이 보였다. 김해서 작가의 아버지였다! 블로그를 훑어보았는데, 김해서 작가가 쓴 글을 읽으며 그려보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세심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시와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는 작가 근원의 일부를 보는 것 같았다. 그걸 알고 나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목이 메어서 아팠다’는 말이 쉽게 넘겨지지 않았다.
시인을 지망했던 김해서 작가는 신춘문예에 거듭 낙방하고도 쓰는 마음만은 버리지 않았다. 시를 먹여 살리고 계속 쓰기 위해 여기저기에 다양한 글을 썼고. 그러면서 브런치에 올렸던 에세이가 모여 책으로 나왔다. 시인이 되지 못했지만 평생 ‘지망인’으로 살고 싶다고 다짐하는 그의 글은 시처럼 아름답고 단단하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일찍 성숙해 세상 물정을 알아버린 아이, 어른과 아이 사이의 애매한 틈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시를 썼던 소녀. 그 소녀는 자라 삶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었고, 세상의 속도와 불안에 휩쓸리지 않는 또렷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다. 그러기까지 많은 시간 자신을 벼렸을 테고 빛나는 모서리를 갖게 되었다.
책으로 작가의 삶을 읽었기에 그의 아버지가 써 준 댓글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김해서 작가가 받아야 할 편지가 내게 온 것 같아 애틋했다. 작가에게 돌려줘야 할까 고심했지만, 내게 왔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모르는 채로 두어야 하는 마음도 있다고, 시간을 품고 자라 적절한 때에 닿아야 하는 마음도 있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딸이 된 것처럼, 답장을 쓰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김해서 작가님 아버님이신가 봐요. 책 읽으면서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은 작가님의 반짝이는 모서리가 된 부분이, 아버님께는 그걸 만들기 위해 홀로 아프게 깎았을 시간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많이 아리실 것 같아요…
이 책 읽으면서 김해서 작가님, 참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계셔서 작가님이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났구나 생각했고요. 가족들 이야기가 특히 너무 좋았답니다. 섬세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나요. ^^”
나의 답장에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댓글을 달아주었다.
“가난이 극복해야 할 무엇이라기보다 삶에서 견인해야 하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게으른 아빠 때문에 너무나 결핍된 환경 속에서 자라게 했던 것이 못내 아파옵니다. 그런 아빠의 흑역사에도 연꽃처럼 맑은 영혼을 유지할 수 있었다니… 하는 마음에 미안함만 쌓였습니다. 이왕 작가가 되었으니 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덥혀주는 문장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리 격려해주시니 본인에게도 큰 힘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바람님.”
짧은 문장에 한 사람의 인생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작은 메모에 진심을 토로하는 글로 답한 아버지의 마음은 딸에 대한 그윽한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런 비밀스러운 고백을 들을 자격이 내게 있을까, 무슨 자격으로 이들의 사랑을 엿보는 영광을 얻었을까. 이 글은 주인을 잘 찾아온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차분히 답장을 보냈다.
하루 종일 내게 온 낯선 편지를 생각했다. 김해서 작가가 삶과 시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꾹꾹 눌러쓴 길고 아름다운 편지(책)와 그걸 읽고 답장처럼 썼던 나의 편지(리뷰), 거기에 온 뜻밖의 답장(저자의 아버지가 쓴 댓글)까지. 나의 왼편엔 김해서 작가가, 오른편엔 그의 아버지가 앉아서, 속마음을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의 블로그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무해하고 안심할 만한 벽면처럼 잠시 우리들 사이에 존재했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내게는 하나의 책에 대한 별책부록이 생겼고. 거기에는 ‘첫 책을 낸 딸에게 쓴 부치지 못한 아버지의 편지'라 이름 붙은 에필로그가 담겨 있다.
간절한 마음은 닿기 마련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처럼 부치지 못한 편지는 다행히도 아주 빠르게 가야 할 곳을 찾아냈다. 다음 날, 김해서 작가에게서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받았는데 내 블로그에서 아버지의 댓글을 발견하고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나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에 온전히 고마워했고 자신의 계정에 또 하나의 답장을 올렸다.
“내 독자와 아빠가 나누는 대화를 보게 될 날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비관해서라기보다는, 정말 상상조차 못 해봤다. 그런데 보고 말았다. 내가 바란 적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풀이 죽은 적도 없었던 그냥 알아서 온 빛나는 미래가 거기에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이런 사랑을 볼 수 있는 삶이라니. 난 계속 살아야 해. 살 수 있는 날까지, 완전히 살아야 해.’
살아낸다. 살다 보면, 또 어떤 미래가 와 있겠지. 내가 사랑하고야 말.”
- 김해서
책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책으로 김해서 작가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그를 읽으며 내 어린 시절과 나를 만들어 준 사람들을 떠올렸다. 작가의 삶 한 귀퉁이와 내 것을 보이지 않는 실로 꿰매었다. 그랬는데 거기에 작가의 아버지라는 선명한 한 땀이 수놓아졌다. 한 권의 책을 사이로 작가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쌓였고, 어쩌다 그이의 아버지와 블로그 이웃이 되었다. 한 땀 더 나아가 본다. 나의 아빠, 어릴 적 나의 우상이었던 아빠라는 한 땀을 더 새겨본다.
내게도 아빠가 있었다면, 작가의 아버지가 쓴 댓글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알아갈 수 있는 아빠와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면, 김해서 작가의 글 속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읽히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섬세해서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 슬픈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 그녀의 글에 그려진 아버지의 어떤 모습은 나의 아빠와 닮아 있었으니까.
언젠가 내게도 첫 책을 내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더라도 나의 기쁨을 아프게 축하해줄 아빠는 이제 안 계시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도 그 아버지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자신이 내어주지 못한 걸 아파하며 그런데도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만들어가는 딸을 대견해하지 않을까. 그러니 살아야겠다. 더 열심히 살고 쓰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내내 궁금해하면서. “살아낸다. 살다 보면, 또 어떤 미래가 와 있겠지.” 우연히 찾아오는 빛나는 순간과 상상 밖의 연결이 별자리처럼 그려지겠지. 기어코 사랑하고야 말 사람들과 삶이 내게도 있으니.
뜻밖의 기회로 누군가의 편지를 읽었고, 그 편지에 의도치 않은 답장을 썼다. 그러느라 슬프게 기뻤다. 두 사람이라는 책장 사이에서 불투명하고 얇은 간지가 되어 팔락거리는 동안 말할 수 없이 뭉클했다. 그 사이에 놓일 수 있었던 건 순전한 우연이자 나의 행운. "바란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그냥 알아서 온 빛나는 순간."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순간, 나만이 알아챌 수 있는 고유한 빛을 찾아 계속 걷고 싶다. 그 빛을 모아 지도를 그린다. 우연과 빛, 슬픔과 기쁨이 모여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아름다울 삶의 지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