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메모장

어쩌다 캠핑

by 춤추는바람






캠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날씨. 비단 캠핑뿐이랴, 매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날씨일 것이다. 집이라는 견고한 보호막을 벗어던진 캠핑에서는 궂은 날씨로 받는 타격이 훨씬 크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거센 날은 바깥 활동이 불가능한데 텐트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다. 텐트의 비닐막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더 요란하게, 바람의 흔들림을 더 강력하게 증폭시킨다. 캠핑 초보에 장비도 허술한 우리는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샐까, 바람이 거세면 텐트가 무너질까 노심초사한다.



예기치 않은 추위도 그렇다. 지구 반대편인 호주는 절기상 여름이라, 반 팔 위주로 옷을 챙겼다. 추울 걸 대비해 넣은 것도 약간 도톰한 점퍼 정도. 산속에서 밤을 보내며 한기에 떨고 난 후부터 혹시나 하고 넣었던 내복부터 반팔 티셔츠, 긴 팔 티셔츠, 그 위에 청남방, 그리고 스웨트 셔츠, 점퍼 순으로 여러 겹 껴 입고 지낸다. 그러다 해가 뜨면 하나씩 벗고 해가 지면 다시 겹쳐 입으면서. 종잡을 수 없는 호주의 여름 날씨. 맑은 하늘에 해가 나면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인데 그러다가도 해가 구름 뒤에 숨으면 금세 서늘하다 못해 추워진다. 거기에 강한 바람이 더해지면, 늦가을 분위기로 훌쩍 넘어간다.





멜버른 교외의 밸러렛(Ballarat) 캠핑장에 머물고 있다. 수영장과 플레이 그라운드 등 아이들 놀이 및 다양한 편의 시설이 갖춰진 리조트형 캠핑장이다. 도착하는 날부터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밖에서만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은 여름이 생각보다 춥고 맑은 날보다 구름 낀 날이 훨씬 더 많다는 것. 매사 그렇듯 기분에 따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한다. 날씨가 좋은 날엔 이래서 호주가 살기 좋구나, 땅이 넓고 날씨가 좋으니 농축산물도 풍부하고 사람들이 여유롭지, 싶다가도 날씨가 흐려 기분까지 우울한 날엔 좋아 보이던 여유와 풍요에서 과잉의 기운이 읽힌다. 내 안의 부정적인 시선이 고개를 내민다.



눈앞에 푸른 바다와 너른 숲이 있을 때는 여백이 많은 풍경을 보며 머리를 비웠는데, 캠핑을 위해 조성된 인공적 환경(리조트형 캠핑장)에서는 텐트와 캠핑카가 밀집해 있어 답답하다. 캠핑장에서 한가로이 고기를 구워 먹고, 일없이 TV나 보는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자연 속 캠핑장이나 여기나 다를 게 없건만 이곳에서는 유독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복잡해지는 생각을 멈추고 단순해지려고 노력한다. 가만히 있는 게, 특정한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게 제일 힘들다. 누가 들으면 행복한 불평, 속 편한 소리라고 혀를 차겠지만. 나라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활동으로 어느 정도 분주하여 리듬감있는 생활이 몸에 맞다. 몰두하여 무언가를 끝마치고, 머리를 굴려 생각을 정리해야 마음이 편하다. 정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잠자코 두는 게 어렵다.



담백함의 미덕을 생각하다가도, 섬세한 무언가를 맛보고 싶어 진다. 자연과 교감하는 평화로움과 여유도 좋지만 그걸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인간만의 섬세한 정신, 자연과 다른 인간 존재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정신도 필요하다. 섬세의 정신이 그립다.



그런 내게 언제든 펼쳐볼 수 있는 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책을 펼치면 단숨에 정신의 숲으로, 영혼의 풍요로운 바다로 빠져들 수 있다. 눈앞의 현실은 잊히고 머릿속 뒤엉킨 실타래도 잠시 뒷전으로 보낼 수 있다. 책이 품고 있는 문학과 사유의 숲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몇 번 시도했으나 그만두고 말았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을 챙겨 왔다. 느긋한 상태에서 읽힐 것 같은 책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여백이 많은 이번 여행에서야 프루스트의 만연체 문장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캠핑을 시작하고 며칠 사이 책 한 권을 다 읽었으니. 어디로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의식의 흐름에 따른 관념적 문장이 현실에서 맥을 잃은 정신에 활기를 돋궈 주었다. 수중에 있는 종이책 두 권과 아이패드 속 ebook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



“사실이란 우리 믿음이 존재하는 세계로는 들어오지 못하며, 사실은 믿음을 낳게 한 적이 없지만 파괴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믿음을 끊임없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믿음을 약화하지는 못한다.”

261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방황하던 정신에 프루스트의 문장이 위안을 건넨다. 편협한 믿음에 사로잡혀 마음이 어수선한지도 모른다고. 인위적으로 쾌적한 시설보다 불편하더라도 야생의 자연에서의 캠핑이 더 유익하다는 믿음, 풍요로운 환경이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한다는 믿음. 유용하게 시간을 써야 한다는 강박까지. 성급한 일반화나 틀에 박힌 관념으로 강화된 믿음이 사실과 무관하게 눈앞의 현실을 비틀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안해하는 마음을 독서로 달랜다. 지금 내겐 어떤 활동이나 경험보다 책 한 권이 다디달다. 틈만 나면 책을 펼치고 아이폰 메모장을 열어 무언가를 적는다. 글을 쓰면서 불안의 이유를 들여다보고 가라앉는 기분을 정돈한다. 글쓰기와 독서가 든든한 마음 수련의 도구이자 고요한 명상의 장소가 되어 준다. 책을 읽다 보면 빗방울 소리, 바람의 울부짖음도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니 여행을 와서도 일상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과 짜릿한 액티비티보다 조용히 책 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스며드는 불안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주어진 역할이 없고 해야 할 일이 명확하지 않을 때, 내가 보내는 시간에 뚜렷한 이름을 붙여주지 못할 때 불편해지는구나, 나라는 사람은 이런 상태에서 불안하구나, 깨닫는다. 불안에 휩쓸리는 대신 그 마음을 글로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젠가의 전력질주를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이라고. 그때엔 빈 시간이 절실해 질거라고. 복잡한 생각으로 씨름하는 사이에도 아이는 신나게 노느라 정신이 없고, 말도 잘 못하는 영어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으니, 아이를 위해 잠시 멈춰 있어도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다가도 생각이 잘라지지 않으면 얼른 책을 펼친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사로잡혀 하루를 망칠 이유는 없다. 책 속 이야기를 쫓다 보면 불필요한 고민이 흩어져 버린다. 그러니 잠 잘 때도 영혼의 등불인양 머리맡에 책을 둔다. 수영장을 갈 때도, 바닷가에 갈 때도 책 한 권 잊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나선다. 책과 메모장만 있다면 어떤 시간도 두렵지 않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불안과 걱정으로 위태롭더라도, 이들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고요라는 나만의 집을 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