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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Mar 10. 2023

마음에도 중력이 있지

오늘도 글쓰기 모임에 갑니다



구두를 수선하러 구둣방에 갔다. 자주 신는 굽 낮은 검정 구두가 있는데 가죽이 부드러워 쉽게 앞코가 까졌다. 한 번은 넘어지는 바람에 발등도 살짝 찢겼다. 그런데도 발을 감싸주는 느낌이 좋아 오래 신고 싶은 신발. 때를 놓치지 않고 구두 굽을 갈아 줘야지, 앞쪽엔 덧창도 대어야지 생각만 하고 구둣방에 가는 일을 오래 미루었다.



늦기 전에 챙기려 구두를 들고나갔던 날이다. 구두 수선점은 동네 전철역 앞에 있다. 코로나 기간에는 문이 닫혀 있던 적이 많았고, 외출이 잦지 않아 운동화를 신는 게 일상이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문은 열려 있는데 주인이 없었다. 아저씨가 자리를 비우셨나 싶어 주변을 살피며 기다렸다.



잠시 후 한 분이 서둘러 다가와 “어서 오세요” 하며 회색 상자 같은 구둣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반짝이는 구두가 한눈에 들어왔다. 구두 굽 수선을 요청드리고 한 편에 앉으니 일하는 아저씨가 보였다.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검은 구두만은 영롱하게 빛났다. 뭐랄까, 아저씨의 자부심 같았다.



잘 보이지 않아 남들은 모르더라도 나만은 중요하게 챙기는 게 있지 않나. 했는지 안 했는지 나만은 잘 알아서 그걸 갖춰야 기분이 좋고 든든해지는 일. 힘을 북돋고 가치를 부여해 나를 돌보는 일. 누구에게나 그런 것 하나쯤 있지 않을까. 아저씨에겐 그게 구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구두만은 깨끗해야 한다고. 그래야 하루 일이 잘 풀리고, 그날의 일을 무사히 해낼 수 있다고.



나만 아는 무언가를 챙기는 건 자존감과 연결된다. 내겐 무엇이 그럴까.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일, 아침마다 쓰는 일기, 약속이나 모임 없이 혼자 읽어 나가는 책과 스스로 만든 마감 아닐까. 아무도 모르고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늦잠을 잔 날은 숙제를 못한 아이처럼 못마땅한 기분이 된다. 잘 쓰든 못 쓰든 한 편의 글을 써낸 날은 그날의 일을 완수한 것처럼 흡족하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며 하루를 시작하면 삶 위에 단단히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음의 중심이 잡힌다.



다른 이의 구두를 닦아주고 수선해 주기 전에 자신의 구두부터 살피는 게 아저씨의 직업 정신 같은 걸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구두를 돌보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구두부터 잘 챙기는 건 기본이라고. 일에 임하는 자세이면서 실력까지 드러낼 수 있다. 구두를 수선하는 아저씨의 손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구두 바닥을 정리해 접착제를 바르고 새로 붙일 밑창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접착제가 마르는 사이 구두 가죽의 벗겨진 부분을 다듬어 약을 칠했다. 과정은 질서 정연했고 손길은 꼼꼼했다.



15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수선은 4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수선을 마친 구두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쑥했다. 가죽이 벗겨져 색이 흐려진 부분은 다시 검어졌고 얼룩덜룩하던 바닥에도 윤이 나는 밑창이 생겼다. 발을 넣어 보니 두툼해진 바닥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새 신을 신은 것처럼 발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체력이 소진되었는지 감기에 걸렸는데 근 한 달을 앓았다. 부작용이 졸음이라는 감기약 때문인지 그 한 달간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걸 자주 빼먹었다. 그러느라 매일 쓰던 글도 흐지부지. 당장 급한 일에 쫓겨 ‘나만의 구두닦이’ 같은 걸 지키지 못했다. 그러느라 내 마음의 중력은 약해졌으려나.



오랜만에 글쓰기 모임에 갔다. 연말의 모임이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두 달 만. 올해 첫 모임을 마감이 임박한 일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번 모임도 그럴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참석했다. 그러니 주어진 과제도 제대로 못한 채였다. 이번 글쓰기 주제는 '나의 찬란한 어린 시절'. 하는 수 없이 예전에 써 두었던 것에서 주제에 근접한다고 여겨지는 글을 골라 급히 손을 보아 들고 갔다. 어설프게 끼워 맞춘 글은 생뚱맞았고 이내 헛헛한 마음이 들게 했다.



친구들의 글에는 어릴 적 소소한 사건이 담겨 있었는데 모래알 같은 기억이 그들의 무게 중심이 된 것 같았다. 손을 데고 물에 빠졌던 기억, 매일 일기를 쓰며 바쁘게 자라나던 시절의 일,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던 유년. 오늘의 그녀들과 생활의 토대가 무엇 위에 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평탄했다고 여겼던 나의 유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싶게 하는 글. 한 사람의 근원, 내가 딛고 있는 땅 깊은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지 발굴해 보고 싶어 졌다.



그날따라 하루님이 조용했다. 처음엔 과제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도 몰랐다. 늘 빠지지 않고 글을 써 왔던 분이니까. 모두의 발표가 끝난 후 조심스레 글을 올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써 온 글이 있지만 올릴 수 없었다고. 일부라도 읽어 달라는 참석자들의 성화에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만 읽어 주었다. 글을 읽는 그녀의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 울음기가 번졌다.



그늘을 견뎌야 했던 기억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글을 쓰면서 울었다는 것, 혼자 눈물 자국을 지웠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커다란 상처가 있고 그걸 버티며 유년을 넘었나 보다. 여전히 상처는 아물지 않은 것 같았다. 아픔과 상처야말로 삶이 주는 소중한 보물이라는 걸 알지만, 그런데도 그걸 통과하는 순간의 고통은 절대적일 테다. 더군다나 이십대라면. 나 또한 작은 상처에 시지프스가 짊어진 바위처럼 삶 전체가 짓눌리지 않았던가.



하루님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이 조심스레 오갔다. 그때 단풍님이 이런 문장을 꺼냈다. “마음에도 중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오래 안 사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모임에서 보아 온 하루님은 단단한 수정을 내면에 품고 있는 사람 같았다. 참석자 중 가장 어리고 체구도 작아 여려 보이지만 또래에 비해 생각이 깊었다. 원석을 수집하고 소설 습작을 하는 그녀에게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야무진 세계가 있어 보였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중력이 있다고 느꼈다.



글을 쓰는 사이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일과 상처를 조금은 정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느라 눈물을 흘렸을 테지만 울음 뒤에야 떠오르는 말간 느낌으로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마음의 중력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기울어지는 일이니까. 감정을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한 발, 한 발 걸어가 보는 일.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하루님이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다. 자신을 찌르는 유리 조각 같은 상처를 쓰고 또 쓰면서 자기만의 원석을 다듬어가면 좋겠다고.



아저씨의 반짝이는 구두를 생각한다. 날마다 닦으며 의식처럼 행하는 일. 자부심이거나 자존감. 그런 이름이 거창하다면 나를 세워주는 힘이라 하자. 마음의 중력.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나만은 아는, 삶에 꿋꿋하게 해주는 믿음. 나만이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 마음을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기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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