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사라지는 게 아쉬워 우리는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여행을 가면 기념품을 사서 여행의 추억을 박제한다. 물건에 시간을 담아보려 한다. 계절은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그 계절에 나오는 먹거리로 음식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때만 먹을 수 있는 재료가 그릇에 담길 때, 거기에 계절도 잠시 머무는 것 같다.
계절과 시간이 담기는 디저트가 있다. 밀가루 반죽 사이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고 안에는 제철 과일이나 먹거리가 담기는 파이다. 몇 번의 계절을 지나는 동안 인생 레시피라 부를 만한 파이 레시피를 갖게 되었다. ‘계절 담은 파이’라고 이름 붙인 덕인지, 거기에는 계절의 맛뿐만 아니라 추억까지 담겼다.
흔히 타르트와 파이를 혼동하여 사용한다. 둥그런 밀가루 반죽에 속을 채워 굽는 방식이 비슷해서 그렇다. 하지만 바탕인 반죽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고 식감과 맛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둘 다 밀가루와 버터를 기본으로 하지만 타르트 지는 쿠키처럼 단단하고 딱딱한 편이다. 하지만 파이지는 크로와상처럼 얇은 결이 층층이 쌓여 가볍고 파삭하다. 기름종이 여러 장을 겹쳐 놓은 듯 바스락거리는 식감이 경쾌하다.
소금과 설탕, 밀가루와 버터를 섞어 한 덩어리가 된 반죽을 냉장고에 두어 차게 굳힌다. 타르트 지는 냉장고에서 휴지 시킨 반죽을 얇게 밀어 편 후 바로 틀에 성형하여 만든다. 파이지는 반죽을 넓게 밀어 편 후 겹치게 접고, 다시 밀어 펴는 일을 반복하여 층이 생기도록 만든다. 밀어 펴주는 사이사이 냉장 휴지를 하여 얇은 층이 겹겹이 쌓이게 된다. (정식 파이지 만들기는 이것보다 훨씬 더 손 품이 든다. 밀가루 반죽과 버터가 번갈아 한 층 씩 쌓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클래스에서 사용한 파이지는 식감은 비슷하게 내면서 수고는 덜 수 있는 약식 파이지다.)
파이지 만들기의 묘미는 과정의 반복에 있다. 기다란 직사각형이 되도록 반죽의 모양을 잡아가며 밀어준다. 따뜻한 손이 여러 번 닿아 반죽이 질어지지 않도록 속도를 내야 한다. 냉장고에서 꺼내 단단하던 반죽이 밀고 펴는 사이 천천히 녹아 몰랑해지고 부드러워진다. 넓게 펴진 반죽을 삼등분으로 접은 후 다시 밀어준다. 처음 밀 때보다 두 번째에 조금 수월하고 세 번째에 더 쉽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직사각형으로 잡은 모양도 예뻐진다. 반죽 사이로는 시간이 쌓이고 시간은 손을 유능하게 한다.
밀대로 밀 때마다 반죽은 죽죽 늘어난다. 이쪽저쪽 모서리를 향해 방향을 바꾸고 균형 있게 힘을 실어 밀어준다. 한쪽에 지나치게 힘이 쏠리면 덧 대인 반죽이 붙어 버려 나중에 부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과정이라도 소홀하면 나중에 티가 난다.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힘을 가해야 하듯 모든 과정에 마음을 기울인다. 내가 들인 노력이 무엇을 만들고 어디를 향해가는지 지켜본다. 그러는 사이 매끈하게 잘 밀린 반죽에서는 윤이 난다.
학창 시절 교실 뒤에 쪼그리고 앉아 마루 바닥을 닦던 때가 생각난다. 바닥을 열심히 문지르다 보면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정도가 되면 바닥에서도 반들반들 윤이 났다. 내가 들인 공이 눈앞에서 빛을 냈다. 그럴듯한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잘 밀어진 파이지가 선사하는 기쁨도 그렇다. 작지만 마음을 꽉 채우는 뿌듯함이다.
베이킹 수업에 오는 직장인들은 “여기 오는 것만으로 힐링이에요.”라고 자주 말한다. 사람들은 조직 속에 부속화되어 일하는 동안 소진된다고 느끼기 쉽다.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의 과정이 결과와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결과는 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간과 노력이 사라진 것 같아 허무해진다. 하지만 베이킹에서는 과정의 노력이 정직하게 쌓여 결과가 된다. 공을 들이면 들인 대로 고스란히 결과에 보인다. 파이가 그렇다.
결이 생긴 파이지를 최대한 크게 밀어서 동그란 파이 틀 위에 올리고 속을 채운 후 오븐에 구우면 파이는 완성된다. 지난가을과 겨울에는 단호박과 사과 파이를 많이 구웠다. 삶은 단호박을 으깨거나, 사과를 잘게 잘라 졸여서 속으로 채웠다. 단호박과 사과 모두 시나몬과 잘 어울린다. 시나몬 파우더 반 티스푼에 뻔하던 단맛이 오묘해진다. 단맛에도 뜸이 드는 걸까. 깊어지면서 알싸한 뒷맛을 품게 된다. 이제 오븐에 넣어 파이지 사이에 잠자고 있던 공기를 뜨거운 열로 팽창시킬 일만 남았다. 반죽 사이에 차곡차곡 쌓아 둔 시간이 파이를 부풀릴 것이다.
오븐에 들어간 파이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을 지켜본다. 얼마나 부풀고 어떤 모양으로 완성될지 알 수 없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호박의 달큼한 냄새와 버터의 고소한 향이 간지럽힌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어딘가 담기기도 한다. 계절은 파이 속에 머물며 함께 만들고 나누어 먹었던 시간을 추억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