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유난히 복숭아를 많이 먹었던 여름을 지나고 아이가 생겼다. 콩알만 한 아이를 뱃속에 품고 ‘복숭아야’라고 불렀다. 복숭아처럼 곱고 보드랍고 어여쁜 아이이길 바랐다. ‘복숭아’는 ‘슝슝이’가 되었고 아가는 태어나고도 일 년을 ‘슝슝이’라고 불렸다. 복숭아는 내게 특별한 과일이 되었다.
느린산책을 열고 맞는 첫여름이었다. 복숭아로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었다. 아낌없이 과일을 넣었다. 한 번은 아빠 생신이라며 케이크를 주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러 번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고심하던 손님은 복숭아 케이크를 골랐다. 아빠를 위해 특별한 케이크를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전해져 재료를 준비하는 마음도 각별해졌다. 케이크에 들어갈 복숭아는 너무 단단해도, 지나치게 물러서도 안된다. 잘 익어 단맛이 짙으면서도 모양은 흐트러지지 않게 다부져야 된다. 정성껏 복숭아를 골랐다.
고운 복숭아만 골라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시트지와 크림 사이에 빽빽하게 과일 조각을 채웠다. 크림 속에도 복숭아 살을 갈아 넣었다. 한 입 먹으면 복숭아의 달큼한 향과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울 수 있게.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났다. 우리 아빠도 복숭아를 좋아했지. 생신을 맞은 아빠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 하는 그분의 마음이 내 것 같았다. 어디서도 먹어본 적 없는 복숭아 케이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연락을 주고받으며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아가씨 둘이 케이크를 가지러 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신 있게 답을 적은 시험지를 선생님께 내미는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케이크 상자를 건넸다. 박스를 받아 들고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도 나처럼 설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멈춰 서 발을 굴렀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 아이들처럼 말이다. 그날 저녁 ‘너무너무 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 메시지가 도착했다. 복숭아처럼 달콤한 말이었다.
언제부턴가 여름이 좋아졌다. 여름을 기다리게 되었다. 단단하게 잘 익은 복숭아를 아이와 나눠 먹고 싶기 때문이다. 복숭아를 먹으며 지나간 여름을 이야기하고 싶어 그렇다. 마음을 기울이는 게 먼저인지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는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마음과 그 대상이 제대로 만났을 때 특별함이 생긴다. 열쇠 꾸러미 속에서 구멍에 딱 맞는 열쇠를 찾았을 때처럼, 마음의 모양이 딱 들어맞는 자리와 만나야 불은 켜진다. 특별함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생크림 케이크를 만드는 수업도 특별하다. 다른 수업보다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반죽은 거품이 꺼지지 않게 빨리 마무리해 오븐에 넣어야 하고 생크림은 적당한 상태로 휘핑해야 한다. 휘핑이 조금이라도 과하거나 덜해도 아이싱 작업(케이크 겉면을 휘핑한 크림으로 덮어주는 작업)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업을 들으러 오는 수강생들의 마음도 조금 다르다. 처음으로 만드는 케이크에 대한 설렘으로 부풀어 있거나 제대로 아이싱을 배워가겠다는 다짐으로 의기 충만하다.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생크림을 케이크 겉면에 얇고 매끈하게 펴 바르는 일은 단련된 나의 마음도 알게 모르게 긴장하게 한다. 재료와 도구를 철저하게 챙기고 앞치마를 단단하게 둘러매게 한다. 대개 취미로 베이킹을 하는 수강생들은 내 시연만 보고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수업이 끝나면 너무 힘들었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 뒤에 덧붙이는 말이 참 이상하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마음을 들인 만큼 기쁨은 오는 걸까. 수강생들은 처음 해보는 생크림 아이싱에 너나 할 것 없이 잔뜩 긴장한다. 그 어느 수업에서 보다 집중해서 만든다. 매끈하게 마무리하고 싶어서 손을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잘하고 싶어서 이쪽저쪽으로 몸을 기울여가며 살피고 또 살핀다. 그렇게 마음을 쏟고 나면 케이크를 완성했다는 것만으로 뿌듯해지고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게 대견해진다. 사람들이 수업에 올 때 가졌던 마음의 모양이 그날만큼은 콱 차고도 넘치는 자리를 찾아낸 것 같았다.
직접 만든 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았다. 나와 수강생 모두를 위한 기념사진이었다.
겨울이 되면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케이크를 만들었지만 만드는 한 번도 지겹지 않았다. 딸기 케이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딸기가 부드러운 생크림과 만나 입 안에서 녹아내릴 때 무심하던 사람들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미소가 번졌고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 이젠 흔해진 생크림 케이크인데 딸기 생크림 케이크만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비밀의 열쇠는 딸기라고 믿고 있다.
딸기 케이크 수업은 12월에 시작해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딸기가 들어가는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다. 12월의 첫 딸기부터, 이듬해 봄의 끝자락까지 온갖 딸기를 맛보았다. 그리고 12월 딸기의 특별함을 알게 되었다. 겨울의 추위 속에 맺힌 딸기는 따스한 봄바람에 자란 딸기보다 단단하고 풋풋하다. 새콤하고 달콤한 맛의 농도가 짙다. 값을 더 주고라도 12월 딸기는 챙겨 먹는다. 새빨간 열매가 품고 있는 봄의 소식을 앞당겨 듣는다.
12월이 되면 케이크 수업을 기다렸다.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한 케이크 장식을 고심하며 준비했다. 온 마음을 쏟았다. 그러는 사이 평범한 딸기 케이크는 특별해졌다. 겨울은 딸기 케이크의 계절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겨울은, 눈과 딸기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