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캠핑
도시를 떠나 한참을 달리고 포장 도로가 끝난 지점에서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는 울퉁 불퉁한 길을 또 달렸다. 첩첩 산중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곳, 와야티나(wayatinah) 국립 공원에 도착했다. 사방을 둘러싼 짙은 초록의 산, 그 안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초록의 잔디밭에 텐트를 폈다.
캠핑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커다란 호수가 나온다. 머리 위의 하늘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또 하나의 하늘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풀벌레 울음 소리와 새들의 낮은 지저귐, 간혹 바람이 풀을 쓸고 가는 소리만이 고요한 한낮에 부드러운 터치를 남긴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호수 가운데로 나아가는 아빠가 있다. 잔잔한 물살에 낚시대를 드리우는 아이들이 있다.
발 앞의 호수는 짙은 파랑으로 어두운데 먼 곳의 표면은 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문득 저 곳에 보물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오래 바라보았다.
호수 멀리 반짝이는 물아래 무엇이 있을까. 저 아래 있는 존재들은 자신의 주변이 저토록 빛난다는 걸 알까. 나를 둘러싼 삶의 표면도 나만 볼 수 없는 반짝임으로 빛나고 있지 않을까. 멀리서 바라봐야 볼 수 있는 그런 빛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상의 귀함을 절실히 깨닫는 여행이다. 언제나 내게 사랑을 믿게 하는 아이, 삶의 안전망 같은 남편, 마음을 덥혀주는 사람들과 나의 집. 온전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나의 방과 나라는 세계를 그리는 언어, 나의 창문과 풍경. 그곳에서 기다리는 일과 삶. 당연하게 주어졌던 모든 것이 저기 보이는 물 위의 윤슬처럼 아련하게 빛난다. 떠나와 보니, 멀리서 바라보니 알겠다. 오직 내게만 있는 것들, 내가 선택하고 일궈 온 생활, 그로써 고유해진 형태. 그 삶의 빛이 보인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을 마주하고 막힘없이 달리다 보면 내 둘레에 견고하게 쳐진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슴이 쫙 펴지고 살짝 부풀어 오르는 느낌. 그러다가도 별 수 없이 익숙한 것들을 향한 그리움이 빼꼼 고개를 든다. 집과 사람들, 나의 언어와 그걸로 지어가는 풍경. 작고 초라하지만 더없이 평온하고 충만하기도 했던 세계. 그 모든 것이 알맞게 나다웠다고, 나만 아는 근사함으로 빛난다고, 여기 먼 곳에서 깨닫는다.
이제 내겐 특별해서 아름다운 풍경보다 익숙하지만 단짠단짠 한 일상이 더 좋고 소중하다. 남다른 경험과 장면을 찾아 떠나와 보니, 내가 가진 일상의 풍경으로 이미 충분했다는 걸 느낀다. 뻔한 일을 하면서도 온갖 감정을 겪었던, 그러니까 손바닥만 한 도화지에 샐 수 없이 많은 감정의 색을 채우던 생활이. 눈앞의 맑고 선명한 자연의 빛에 비할 순 없을지라도 뿌옇거나 마구 뒤섞여 탁했던 우리만의 색도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이제 내 작은 세계로 돌아가면 하찮고 무의미한 존재로 조금 더 가볍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겠다.
잠든 아이의 이마를 짚어 땀이 나는 걸 확인하고 이불을 살짝 내려준다. 고르고 얕은 숨소리를 들으며 잠자코 아이의 안녕과 고운 잠을 확인한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무탈함을 알고 우리만 아는 사랑의 신호를 주고받는 것으로 충분한 삶. 그러니 먼저 서울로 돌아간 남편의 하루를 떠올리면 마음이 짠해질 수밖에 없고.
먼 곳의 빛을 보며 알았다. 무엇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소중하고 특별한 것은 이미 내게 있다고. 언제든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