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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May 22. 2023

잘 사랑하며 살고 있나 봐

일요일의 말




“어머, 해가 이렇게 길어졌네.”



엄마가 말했다. 나이 든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창 밖으로 번지는 살구빛 노을을 바라보았다. 해는 산 뒤로 넘어가고 빛의 여운만이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 다홍빛 수채화 물감에 맑은 물을 한껏 섞은 것처럼 연하게 어여뻤다. 육교 아래 작은 터널을 향해 가던 순간, 아치형 터널에 걸린 노을 진 도로의 풍경은 오래전 영화에서 보았던 한 장면처럼 아련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의 미래에서 이 순간을 회상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엄마가 우리를 전철역에 내려주면서 이제 나이 들어 깜깜한 밤 운전이 무섭다며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잘 알아서 마음만으로 고마웠고. 잠깐 차를 타고 있는 사이 아이가 잠든 걸 알고 집까지 가자는 엄마를 극구 말리며, 서윤이를 깨워 내렸다. 엄마의 까만 차가 떠나고 길 위에 섰을 때 아이는 밀려오는 졸음이 힘겨웠는지 울음을 터뜨렸고. 그런 아이를 끌어안아 주며 미안해서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내려주며 안타까워하던 엄마의 마음이 이랬겠구나. 시간 차를 두고 서로 다른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더듬는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금세 기운을 차린 아이는 아빠에게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저녁 준비로 분주했다. 아이를 위한 김치볶음밥과 우리가 먹을 메밀면. 남편이 삶아 놓은 메밀면에 참나물 씻어 넣고 간장에, 식초, 설탕 조금, 들기름 듬뿍 뿌려 비볐더니 입맛을 당기는 한 그릇이 뚝딱 완성되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기분 좋게 가슴을 부풀리는 5월의 바람. 며칠 전이 입하였던가. 봄이 끝나가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또다시 좋은 계절이 다가옴을 예감했다. 3월도, 4월도 좋았지만 5월도 좋다고. 6월의 둥그런 바람은 또 얼마나 좋을까. 오늘에 기뻐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이 오랜만인 듯 반가웠다.



잘 사랑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이라고 딸아이 원하는 것 다 들어주고 어버이날 앞두고 시간 내어 엄마를 만나고. 번거롭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더니 순간은 다른 얼굴로 내게 왔다. 더 좋은 걸 줘야 한다고 기준을 들이대는 대신 아이의 마음 따라 놀이동산에서 신나게 놀았던 그 밤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꽃 시장 가서 꽃을 고르고 꽃 바구니 직접 만들어 엄마에게 드린 일, 거칠어진 엄마 손 잡고 오래 걸었던 건 참 잘했구나 싶다. 지금 전할 수 있는 마음 미루지 않고 보내 가뿐함만 남았다. 내어줄수록 상쾌해지는 마음이라니, 사랑만이 만들 수 있는 표정이다.



기쁨이 서로를 오가며 몸집을 불리는 일, 내게 와서 좋은 것보다 나와 당신 사이에서 좋은 일이 여전히 더 좋다. 내겐 그게 사랑인 것 같고. 들뜬 기분으로 지냈던 요 며칠 사랑에 열심이었나 보다.



메밀면 소박하게 먹고 접으려던 식탁에 남편이 와인 잔을 올렸다. 아보카도에 토마토, 양파 잘게 썰어 넣고 소금, 후추, 레몬즙으로 간한 과카몰리까지 만들어 내고. 5월 저녁의 청신한 바람은 쇼비뇽 블랑과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남편이 걸어 놓은 플레이 리스트는 스피커로 흘러나와 몸에 잘 맞는 감 좋은 옷처럼 귀를 감쌌고.



이런 저녁을 좋아했었지. 해야 할 일 잘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저녁. 산뜻한 바람과 가볍게 공기를 끌어올리는 음악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탁 풀어놓는 시간. 긴장이나 불안 한 점 없이 말간 감정으로. 마주 앉은 사람들 사이 동일한 기분이 오가는 걸 확신하며 넉넉하고 둥그런 감정의 자리에서 온전한 내 집에 있음을 맞이하는 것. 이런 걸 안온함이라고 하는 걸 테지. 익숙하면서 오랜만인 듯한 그 기분을 잘 기억하고 싶었다.



딸아이는 보드 게임을 들고 와 식탁 한 편에 펼쳤고, 후식으로 딸기를 먹으며 게임을 했다. 올해만큼 딸기를 열심히 먹었던 적이 있었나. 지나치게 달지도 시지도 않은, 특출 나게 눈길 사로잡는 구석도 없는 딸기. 새콤달콤하면서 아삭하고 톡톡 씹히는 씨앗이 재미나 자꾸 손이 가는, 계속 예뻐해 주고 싶은 과일. 이번 봄의 삶이 딸기를 닮았다. 특별하지 않지만 소박하게 정답고 어딘가 어여쁜 구석도 있는. 때론 물러 버리거나 이도 저도 아닌 밍밍한 맛의 딸기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아끼는 마음만은 거둘 수 없는 그 과일처럼. 세 식구 모두 좋아하는 딸기처럼, 삶도 우리에게 적당한 맛과 색으로 물들고 있다.



오늘 먹는 딸기가 올봄 마지막일까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 마음 어디로 보내줘야 할지 알겠다. 5월이 좋아, 6월이 좋을 걸 기대하듯, 언젠가 6월이 좋다고 적어 놓은 문장을 기억하듯, 그 계절과 함께 찾아올 아오리 사과와 그다음의 복숭아에게 보내 줘야지. 딸기의 마음을 배웠으니 그걸 품고 있으면 될 것 같다. 가까이 있는 것 살뜰히 보듬으며 충실히 기뻐하자고. 시간과 거리의 차가 있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더듬어 보려 애쓰면서.



해가 길어졌다. 들꽃과 들고양이처럼 작은 것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내미는 나이 든 엄마가 내 안에, 그리고 아이 안에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로 삶이 흐르고, 달과 달, 계절과 계절 사이로 삶이 엮인다. 오고 가는 것 잘 맞이하고 자연스레 놓아줘야지. 노란 조명 아래 메밀면, 딸기 한 접시 두고 집에 왔다고 느끼던 환한 순간들 쉼표처럼 찍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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