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말
“어머, 해가 이렇게 길어졌네.”
엄마가 말했다. 나이 든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창 밖으로 번지는 살구빛 노을을 바라보았다. 해는 산 뒤로 넘어가고 빛의 여운만이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 다홍빛 수채화 물감에 맑은 물을 한껏 섞은 것처럼 연하게 어여뻤다. 육교 아래 작은 터널을 향해 가던 순간, 아치형 터널에 걸린 노을 진 도로의 풍경은 오래전 영화에서 보았던 한 장면처럼 아련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의 미래에서 이 순간을 회상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엄마가 우리를 전철역에 내려주면서 이제 나이 들어 깜깜한 밤 운전이 무섭다며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잘 알아서 마음만으로 고마웠고. 잠깐 차를 타고 있는 사이 아이가 잠든 걸 알고 집까지 가자는 엄마를 극구 말리며, 서윤이를 깨워 내렸다. 엄마의 까만 차가 떠나고 길 위에 섰을 때 아이는 밀려오는 졸음이 힘겨웠는지 울음을 터뜨렸고. 그런 아이를 끌어안아 주며 미안해서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내려주며 안타까워하던 엄마의 마음이 이랬겠구나. 시간 차를 두고 서로 다른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더듬는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금세 기운을 차린 아이는 아빠에게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저녁 준비로 분주했다. 아이를 위한 김치볶음밥과 우리가 먹을 메밀면. 남편이 삶아 놓은 메밀면에 참나물 씻어 넣고 간장에, 식초, 설탕 조금, 들기름 듬뿍 뿌려 비볐더니 입맛을 당기는 한 그릇이 뚝딱 완성되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기분 좋게 가슴을 부풀리는 5월의 바람. 며칠 전이 입하였던가. 봄이 끝나가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또다시 좋은 계절이 다가옴을 예감했다. 3월도, 4월도 좋았지만 5월도 좋다고. 6월의 둥그런 바람은 또 얼마나 좋을까. 오늘에 기뻐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이 오랜만인 듯 반가웠다.
잘 사랑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이라고 딸아이 원하는 것 다 들어주고 어버이날 앞두고 시간 내어 엄마를 만나고. 번거롭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더니 순간은 다른 얼굴로 내게 왔다. 더 좋은 걸 줘야 한다고 기준을 들이대는 대신 아이의 마음 따라 놀이동산에서 신나게 놀았던 그 밤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꽃 시장 가서 꽃을 고르고 꽃 바구니 직접 만들어 엄마에게 드린 일, 거칠어진 엄마 손 잡고 오래 걸었던 건 참 잘했구나 싶다. 지금 전할 수 있는 마음 미루지 않고 보내 가뿐함만 남았다. 내어줄수록 상쾌해지는 마음이라니, 사랑만이 만들 수 있는 표정이다.
기쁨이 서로를 오가며 몸집을 불리는 일, 내게 와서 좋은 것보다 나와 당신 사이에서 좋은 일이 여전히 더 좋다. 내겐 그게 사랑인 것 같고. 들뜬 기분으로 지냈던 요 며칠 사랑에 열심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