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서 사랑하게 된 날들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학교에서 글짓기를 하나 해왔다. 아이는 나를 ‘거북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엄마는 아주아주 느리거든요. 엄마는 아주아주 수영을 잘하거든요.”
거북이라니. ‘토끼와 거북이’에서 느릿느릿 걷는 그 거북이? 발 빠르고 잔꾀 많은 토끼에게 놀림을 당하는 그 거북이? 자주 종종 거리고 해야 할 일은 가능한 한 빨리 해치우려는 나의 성미는 토끼에 가까운데. 아니었나, 내게도 거북이 같은 면이 있었나.
토끼처럼 바쁘게 살았는데
대학 시절 2년 휴학을 했던 나는 동기들보다 취업이 늦었다. 결혼과 출산도 남들에 비해 한참 뒤에 했고 십 년간의 회사 생활을 접고 가게를 하다, 작년부터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마흔 중반을 넘어선 지금, 나는 여전히 초보다. 선택의 기로, 변화의 시점마다 남들과 다르거나 뒤쳐졌다는 게 불안을 부추겼다.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자다 깬 토끼처럼 헐레벌떡 정신없이 달리기도 했다. 한 길을 우직하게 파고들기보다 관심 가는 데로 기웃거리느라 깊이라는 것도 만들지 못했는데. 빠르게 훑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고 또 다른 걸 시작하고... 그건 토끼 같았는데, 이상하다. 나도 내가 점점 거북이 같다. 토끼처럼 산 것 같은데 결승점이 가까워지기는 커녕 갈 길이 멀다고 느껴져서다.
그렇다. 내 삶은 거북이걸음 중이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게 지금은 좋다. 멀다는 건 시도할 기회가 많다는 의미로, 그만큼 배우고 경험할 일이 풍부하다는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이젠 다른 이와 경쟁하겠다는 마음이 없으니 서두를 필요 없고 내게 맞는 속도로 꾸준히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가보고 싶은 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길은 글쓰기. 그러는 사이 거북이의 마음 같은 게 자랐나 보다.
거북이를 닮아가고 있다
가게를 접고 인생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허탈함에 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나의 진심을 알아보게 해 주었다. 표면적인 사건, 말과 행동을 글로 적다 보면 삼킨 말과 숨은 표정이 뒤늦게 당도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상처받았던 마음을 발견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말할 수 없이 기쁘거나 슬픈 심경이 떠올랐다. 가만히 글로 정리하는 시간을 통과해야 사건과 감정의 민낯을 볼 수 있었으니 나의 성정은 느림에 가까운지 모르겠고.
글을 쓸수록 슬픔은 슬픔으로 명료해지고 기쁨은 기쁨으로 환해졌다. 무심해 보이는 삶의 표정을 섬세하게 구별하고 이름 붙여줄 수 있었다. 엇비슷한 매일이 제각각의 이름표를 달고 일기장과 노트북에 차곡차곡 쌓였다. 사회적으로 인정해 주는 명함은 없고 통장의 잔고도 적지만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로 삶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내 삶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던 때 좋아하는 사진을 찍어 켜켜이 쌓으면서 “그걸 제 삶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거였고요”라고 쓴 어떤 작가의 말처럼. 나와 내 삶을 사랑할 수 없을 때 가장 많은 글을 썼고 쓰면 쓸수록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생활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건 아니다. 표면의 소소한 변화가 없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바뀌고 있을 뿐. 삶의 속도가 늦어졌고 시선의 각도가 5도 즈음 달라졌달까. 서두르고 재촉하려는 마음이 들면 일부러 호흡을 가다듬는다. 책상 위 달력에 새로운 일정을 추가할 때마다 한 번 더 고민한다. 내게 없거나 멀리 있는 것을 구하려 쫓기듯 달려 나가는 대신 이미 내게 혹은 곁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며 거기 숨은 빛과 무늬를 찾는다.
빠르게 걸으면 지나치고 마는 것이 아까워 속도를 늦추고 사진을 찍고 메모하는 나. 잠자코 서서 하늘을 보고 나뭇잎의 움직임을 느낀다. 앞서 걷는 이의 어깨 선을 눈으로 따라 그리고 빈 의자 위에 놓인 살구 세 알을 골똘히 바라본다. 우연히 귀에 들어온 누군가의 말을 오래도록 곱씹고 눈으로 읽던 책을 손으로 따라 쓴다. 걸음은 더뎌지고 시선은 자꾸 멀리 날아가는데 그럴수록 내가 좋아진다. 시간을 들일수록 글쓰기가 소중해졌듯 삶에 시간을 들일수록, 고심하며 글로 옮길수록 삶이 괜찮아졌다.